귀여운 쿠마몬과 난공불락의 구마모토성으로 유명한 큐슈의 도시 구마모토
여행삼아 많이들 들리는 곳이지만, 시내 한복판에 동방스러운 장소가 있다는 걸 동덕들도 대부분 놓치곤 한다.
신주 ZUN의 발언으로 메리(마에리베리 한)과의 관계가 점쳐지는 아일랜드계 일본인 소설가 코이즈미 야쿠모(라프카디오 헌).
야쿠모가 살던 집이 바로 이곳 구마모토 시내 번화가에 위치해있다.
신주는 유카리와 메리의 관계를 묻는 한 질문에, 코이즈미 야쿠모를 들며 떡밥을 뿌린 바 있다.
그렇다면 코이즈미 야쿠모란 누구인가?
이날은 일본인 친구와 함께 구마모토를 여행했는데, 코이즈미 야쿠모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무조건 실려있는 유명한 작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귀화인 작가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일반인들에게 '라프카디오 한'이라는 본명까진 알려져있지 않다고 했다.
그의 옛집으로 들어서 코이즈미 야쿠모에 대한 기록을 더듬어보기 하자.
복도 한 쪽에 걸려있는 그의 생애에 대한 글을 번역해보았다.
라프카디오 한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한 문호입니다.
일본에서는 '코이즈미 야쿠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리스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유년기를 지냈습니다.
한은 미국에서 20년간 직장생활을 한 뒤에, 메이지 23년(1890년)에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한은 일본의 문화에 매료되어,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존중하고, 자신의 생활 속에 그러한 양식들을 끌어오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집에다 카미다나(神棚, 신토의 신을 모신 제단)을 두고, 일을 하러 가기 전엔 박수를 치며, 인력거에 타고 대학을 오갔다고 합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소중히 여긴 한은, 서양문화를 급격하게 일본에 의식하려고 한 근대 일본의 모습에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구마모토에 살던 중, 한은 문학가로서의 그의 입지를 확립했습니다. 해당하는 시기에 쓰인 그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모습 知られぬ日本の面影」, 「동쪽 나라에서 東の国から」「골동 骨菫」 등이 있습니다.
구마모토나 구마모토의 사람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큐슈의 학생들과 함께 九州の学生とともに」, 「석불 石仏」, 「여름날의 꿈 夏の日の夢」 등에서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한 일가는 구마모토에서 3년간 거주한 뒤에, 고베로 이사를 가, 한도 저널리스트로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고베에서 약 2년간 체재한 뒤, 한은 도쿄제국대학에서 영문학 강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뒤, 메이지 37년(1904)년 와세다대학 영문과의 교원이 되었으나, 그 해 9월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체 왜 한은 일본으로 건너와 야쿠모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을까? 조금 더 찾아보자.
다음은 코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한은 그리스의 영국령 이오니아 제도에서, 영국령 아일랜드 출신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서인도제도에 배속되고, 어머니가 정신병을 앓게 되어, 그는 2살 때부터 아일랜드의 이모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스를 오가며 그는 서양의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의문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16살 때, 그는 회전그네에서 떨어져 왼쪽 눈을 실명한다. 그 뒤로 그는 남들에게 흉한 왼쪽 눈을 보이기 않기 위해 사진을 찍을 때 왼쪽 눈을 숨겼다.
17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급사하고 이모할머니는 파산하는 등 불행이 겹쳤다.
19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20년간 신시내티나 뉴올리언즈의 신문기자로 활약했다.
크레올 문화나 아시아계 이민족들의 기사도 다수 남겨, 그가 다양한 문화에 큰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40대가 되었을 무렵 무렵, 1890년, 그는 뉴욕에서 읽은 영어판 '고사기'에 매료되어 특파원을 자청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1890년 8월에는 시마네현 마츠에의 중학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그 뒤 구마모토와 고베를 거쳐, 1896년부터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 강사가 된다. 1903년, 제국대에서 해고되어, 후임을 나츠메 소세키에게 넘기고, 와세다 대학의 교편을 잡는다.
같은 해에 일본으로 귀화해 '코이즈미 야쿠모'로 개명하나, 1904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 향년 54세였다.
그가 처음으로 일본에서 교편을 잡은 곳은 시마네의 마츠에.
먼 옛날 야쿠모(八雲)라 불리며, 일본 신화의 발원지가 된 곳이다.
야쿠모의 이즈모 대사(出雲大社)는 스사노오(素戔嗚)가 머리가 8개 달린 뱀,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한 곳이다.
여기서 스사노오는 오로치를 퇴치한 뒤, 최초의 와카(일본의 시)를 지었다.
겹겹이 구름 이는 이즈모 땅에, 겹겹이 울타리. 아내를 숨길 겹겹이 울타리를 두르리. 겹겹이 둘러쳐진 울타리를
八雲立つ 出雲八重垣 妻ごみに 八重垣作る その八重垣を
야쿠모(八雲)라는 단어가 겹겹이 늘어선 구름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는데, 이후 이 단어는 이즈모를 뜻하는 대명사격 단어가 되었다.
일본을 사랑했던 라프카디오 헌은, 일본 문화의 발원지를 자기 성씨로 사용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시를 보면, 야쿠모라는 단어를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울타리', 즉 '결계'의 의미로 쓴 것을 알 수 있다.
유카리의 성으로 참 알맞는 단어다.
그렇다면 역시 신주는
라프카디오 헌 -> 마에리베리 한(메리)
코이즈미 야쿠모 -> 야쿠모 유카리의 동일 구조를 꾀한게 아닐까..?
라프카디오 헌은 머나먼 유럽에서 온 분명한 외부인이었지만, 일본에 매료되어 환상 속의 일본을 그의 저작 속에서 그려내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수많은 일본의 전승과 요괴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있는데,
동방에 직접적으로 쓰인 것만 추려내보아도 '하시히메 (파르시), '로쿠로쿠비 (세키반키)', '설녀 (레티)', '호이치 (츠쿠모 자매)' 등 정말 다양하다.
동방 속 메리, 비봉클럽의 역할도 라프카디오 헌의 삶과 닮아있다.
환상 속의 일본을 사랑한 외부자, 그에 매료되어 찾아가 기록한 관찰자.
게다가 메리의 능력은 '결계의 경계를 보는 정도의 능력'
유카리의 능력인 '결계를 다루는 능력'과 흡사하지 않는가?
「라프카디오 헌 = 코이즈미 야쿠모 : 야쿠모 유카리 = 마에리베리 한」 설이 오래도록 도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표로 유사성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라프카디오 헌 (코이즈미 야쿠모) |
마에리베리 한 | 야쿠모 유카리 | |
결계 | 야쿠모는 결계를 뜻한다. 그는 서양세계와 동양세계의 간극을 뛰어넘어 일본에 동화되었다 |
결계의 경계를 보는 정도의 능력 | 결계를 다루는 정도의 능력 |
이름의 유사성 | O | O | O |
외모의 유사성 | - | 금발, 보라색 옷 | 금발, 보라색 옷 |
눈 | 한쪽 눈을 실명하여 남에게 보이길 꺼렸다 |
한쪽 눈에 능력이 있어 남의 손이 닿으면 결계 너머를 보여준다 |
- |
작중 묘사 | 외부 관찰자 -> 내부인 | 외부 관찰자 -> 내부인?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설명 |
동면 활동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
소속 | 제국대학 교수로 활동한 백인 |
제국대학 학생으로 연구 중인 백인 |
- |
지식인 | 대학 교수 | ? | 환상향의 현자 |
활동 시간 | 메이지 | 현대, 근미래 | 하쿠레이 대결계가 쳐진 시기는 메이지 현대까지 활동중 |
과연 정말로 메리와 유카리는 코이즈미 야쿠모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캐릭터일까?
그렇다면 메리 = 유카리 설도 사실일까?
정확히 알긴 힘들겠지만, 참 재미있는 가설이다.
주소
〒860-0801 熊本県熊本市中央区安政町2−6
860-0801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츄오구 안세이마치 2-6
가는 방법
구마모토 시영 전차 스이도쵸역 or 도리쵸스지역 하차, 도보 2분
구마모토성에서 걸어갔는데 10분밖에 안 걸렸으니 성을 들렀다 겸사겸사 걸어가는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무료 관람 가능, 관람 시간이 따로 정해져있으니 확인하시길.
2020년 1월 30일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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