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어느 여자 고등학교 교실. 오후.

 

청춘과 들뜸으로 가득한 낡은 교사.

늙은 선생의 여름방학식 교시가 이어지는 중 학생들의 얼굴에는 저마다의 기대감과 우심이 만면하다.

이윽고 차임벨이 울리자 선생이 교실을 나가고, 왁자한 소음과 함께 학생들은 제각기 짐을 챙겨 일어선다.

 

하나둘씩 반을 나서는 학생들. 당번이었던 학생 네 명만이 남아 청소 도구를 들고 와 청소를 시작한다.

하굣길에 어디에 들를지 담소를 나누는 학생 A와 B와 C. 유독 사나에만이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대걸레질을 하고 있다.

나머지 학생 셋은 사나에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S#2 어느 여자 고등학교 화장실. 오후.

 

청소가 끝나고 밀대와 대걸레를 빨기 위해 화장실로 향한 사나에와 급우 A. 다른 학생 둘은 교실 뒷정리를 하고 있다.

A는 축 늘어져있는 사나에를 보고 공연한 마음이 쓰였는지 말을 건넨다.

 

 

A : (겸연쩍은 목소리로) 괜찮아?

 

 

뒤를 돌아다보는 사나에. A는 만들어진 웃음을 짓고 있다.

사나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걸레 수동 탈수기에 대걸레를 거칠게 밀어 넣는다.

A는 사나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군말을 붙인다.

 

 

A : 왜 그래, 아프면 병원이라도 가라 좀.

 

 

오른쪽 검지로 본인의 머리를 툭툭 치는 A. 사나에는 A를 무시하고 세탁을 계속한다.

이윽고 빨래가 끝나자 거치대에 대걸레를 걸어두고 사나에는 A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A는 한숨을 지으며 탈수기에 걸레를 집어넣는다. A의 등을 응시하며, 이번엔 사나에가 말을 꺼낸다.

 

 

사나에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병원도 가봤어.

 

 

A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한다.

 

 

A : 그래? 뭐라는데?

 

사나에 : 모르겠대. 현대 의학으로는 규명할 수 없다나봐.

 

A : 안 됐네. 이제 방학인데, 도쿄에 큰 병원이라도 다녀와 봐.

 

 

사나에는 A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A는 대걸레를 거치대에 걸어놓고,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 쪽으로 향한다.

사나에도 A의 뒤를 따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질문을 한다.

 

 

사나에 : (느린 어조로) 있잖아, 만약 어떤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가족이나 친구,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다 떠나보내야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A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어이없어 하지만, 손에 비누칠을 하며 즉각 대답한다.

 

 

A : 그 이유가 뭔데?

 

사나에 : 예를 들자면, 아주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위해 네가 희생해야 하는 상황인 거야. 장기기증 같은 거지.

 

A : 정말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고민도 해보겠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나는 잘 모르겠어.

 

사나에 : 그치? 막 엄청나게 이상한 건 아니지?

 

 

사나에는 다짐을 받듯이 재차 확인한다. A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다.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사나에가 결연한 표정으로 A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사나에 : 만약 그 소중한 사람이, 내가 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때?

 

 

A는 사나에의 말에 아연실색하며 질색을 한다.

 

 

A : (얼굴을 찡그리며) 또 그런 이야기야? 너 진짜 이상하다고. 그거 사이비야.

 

사나에 :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도 있잖아.

 

A : 어떻게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행복하냐? 보이는 것만 믿어도 충분한 세상인데.

 

 

사나에는 A의 강경한 태도에 심란해 하며 고개를 푹 숙인다.

A는 사나에의 말에 짐짓 놀랐지만, 사나에가 딱해 보였는지 몸짓을 섞어가며 사나에를 설득한다.

 

 

사나에 : 역시 내 머리가 좀 이상해진 걸까?

 

A : 자, 이거 봐봐. 수도꼭지를 들어 올리면 물이 나오지? 저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지?

이런 게 당연한 상식이고 과학이야. 눈에 보이잖아? 눈에 보이고 누구나 느낄 수 있잖아?

네 머릿속에 들린다는 목소리가 누구에게나 보여? 그 말을 믿어?

 

사나에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지만 그 분은 아마도 존재하시는걸…….

 

A : 미친년…….

 

 

A는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사나에를 화장실에 내버려둔 채 떠나간다.

홀로 세면대 거울 앞에 우두커니 남겨진 사나에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거울 속 사나에가 울고 있다.

 

 

 

S#3 학교 정문 앞 정류장 / 오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터덜터덜 걷는 사나에. 길 건너편에 보이는 학생 무리들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돌린다.

괜스레 아무런 이력도 찍혀있지 않는 휴대전화 메신저 수신함을 뒤적거리며 버스를 기다린다.

갑자기 울리는 문자 메시지 착신음. 어머니로부터 온 문자였다.

 

 

어머니 : 너 오늘 치료 예약 있는거 알지? 엄마는 오늘도 늦게 들어가니까 갔다 와서 밥 차려먹어라.

 

 

사나에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거리고 휴대전화를 탁 소리 나게 닫은 뒤,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나에 : 칫, 또 며칠 안 들어오겠네…….

 

 

 

S#4 읍내 병원 앞길 / 오후.

 

정신과 내원을 마치고 나온 사나에. 약국으로 향하는 길 위로 어슷하게 햇빛이 내리쬔다.

사람들의 생기로 넘쳐나는 활기찬 거리. 그러나 시점을 사나에의 눈동자로 전환하니, 무미건조한 살풍경의 냄새가 풍긴다.

 

문득 사나에의 시야에 들어온 작은 토리이. 사나에는 무상하게 마음이 이끌린 듯 카메라 밖 신역으로 사라진다.

 

 

 

S#5 읍내 스와 신사 섭사 경내 / 오후.

 

석제 토리이를 지나니 바둑판같은 박석 참도가 묵직하게 깔려있다.

낡은 신사엔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진 듯 경내엔 낙엽이 나뒹군다.

토리이 아래에서 합장하고 목례를 드린 뒤 천천히 낙엽을 밟으며 길을 걸어가는 사나에.

 

이내 삐걱거리는 본전 나무계단을 올라, 뿌연 유리창 앞에 선 사나에는 지갑을 꺼내 동전 몇 푼을 새전함 안에 던져 넣는다.

정성스레 두 번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린 뒤, 신을 부르는 박수를 두 차례 친다.

사나에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를 경건함이 내비쳐지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우울감과 수심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먼지 낀 본전 창틀 사이로 위광이 뿜어져 나온다.

사람의 형체와 같은 무언가가 어른거린다. 사나에는 합장을 풀고 빛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S#6 스와 신사 섭사 본전 내부 / 황혼 무렵.

 

빛덩이는 사람 형체로 빚어진다. 사나에가 카나코님이라 부르자 사람 형체는 화답한다.

 

 

사나에 : (경건한 목소리로) 카나코님, 뵙고 싶었습니다.

 

카나코 : 그래, 잘 왔다 사나에. 오늘은 잘 지냈느냐?

 

사나에 : 네, 카나코님 은총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카나코 : 모인 신앙은 있느냐?

 

 

사나에는 고개를 떨어트리고 느리게 가로젓는다.

카나코가 사나에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두 사람은 작은 본전 안에 마주 앉는다.

 

 

카나코 : (사나에를 응시하며) 이제 시간이 없다. 우리도 이만 약속의 땅으로 가야…….

 

사나에 : 제 마음도 그러합니다. 허나, 그 전에 여쭙고 싶은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카나코는 사나에의 당돌한 어조에 웃음을 지으며 응대한다.

 

 

카나코 : 그래, 무엇이냐.

 

사나에 : 첫째는, 왜 하필 미천하고 부족한 저를 선지자, 현인신으로 간택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둘째로, 카나코님이 떠난 이 땅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셋째로, 왜 기적을 널리 보여주시어 믿음을 얻고자 하시지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카나코 : 그 질문이 전부냐?

 

사나에 : 예, 이에 대한 해답만 얻으면, 신앙이 흐르는 땅으로 모시어 행하겠습니다.

 

 

사나에는 머리를 조아리며 카나코에게 배하고, 카나코는 위엄찬 해답을 내려준다.

 

 

카나코 : 첫째 질문은 어리석다. 너는 미천하고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와의 신은 실체가 없으나, 항상 너희들 곁에 존재한다. 나와 같이 말이다.

우리는 대대로 특별한 아이를 현신한 신으로 여겨 신앙케 했다. 그 아이는 스와의 신이 직접 선택한다.

이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선민(選民)이란 말이다. 네 자신의 성분을 기쁘게 여겨라. 사나에.

 

사나에 : 감사합니다, 카나코님.

 

카나코 : 둘째 질문도 신통찮다. 내가 떠나는 땅은 새로운 이치나 믿음이 점령할 뿐이다.

그 이치가 망령된 것이라면 땅은 피폐해지겠고, 선한 신이 도래한다면 다시 젖과 꿀이 흐르겠지.

그 뒤의 일은 알 수 없다. 어차피 나를 따르는 백성은 진정코 나를 따라올 것이니, 알아야 할 연유조차 없다.

 

사나에 : 감사합니다, 카나코님.

 

카나코 : 셋째 질문은 방정맞다. 너는 나를 아직도 의심하는 게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기적을 보고야 신을 믿는 자들의 신앙은 유동적이다. 기적을 보지 않고도 신을 믿는 자들이야말로 신실하다.

기껏해야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거나, 곡식의 수확량이 많아진 것 정도로 나를 믿을 바에야 그깟 신앙 필요도 없다.

또 세상이 바뀌어 내겐 그런 기적을 행할 힘조차 온존하지 못하였다.

 

 

사나에는 어느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카나코에게 대거리한다.

 

 

사나에 : 하지만 카나코님, 외람되오나 당신께서 진정으로 이 땅에 남아 하해와 같은 은총을 널리 펼치신다면,

그에 필요한 신앙을 얻는 것이 급선무되어야 하리라 사료되옵니다.

허나 당신께선 그러한 움직임을 전혀 보여주시지 않으신 채,

아직 신앙이 남아있다는 미지의 땅으로 입성할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입향 여로에 드는 힘조차도 저의 신앙심을 빌려야 하신다면, 저는 대체 무엇을 근거로 당신을 믿어야 합니까?

 

 

카나코는 꽤나 놀란 듯 어조를 바삐 한다.

과장스럽게 팔을 내뻗고선, 본인의 모습을 최대한 사나에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다.

 

 

카나코 : 네가 악령의 꾐을 들었구나. 잘 봐라, 나다. 스와묘진 카나코란 말이다.

네가 저 새전함 앞에서 신을 부르자 내가 나타나지 않았느냐.

그럼 내가 신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이게 어떻게 범인의 용태란 말이냐?

 

사나에 : 그것으론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나가서 뭇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소서.

저는 당신의 너른 신통력을 보아야만 모든 것을 저버리고 당신 뒤를 따르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몇 번 보여주신 자그마한 기적과, 제 눈앞에 현신하신 모습과 목소리만으론 부족합니다.

신심이 부족한 선지자라 죄스럽나이다.

 

카나코 : (애원하는 목소리로) 하지만 이제 내겐 충분한 힘이 남아있지 않다.

부탁이다 사나에, 같이 약속의 땅으로 가자무나.

그곳에 가면 너는 진실로 신이 되어 사람들에게 추앙받을 터이다.

나 또한 다시 백 년 전 위광을…….

 

 

어떤 조화인지 카나코의 모습이 차츰 투명해진다. 허망한 손짓은 이미 사나에에게 닿지 못한다.

사나에는 입술을 깨물며 흩어져가는 빛무리를 바라본다.

 

 

사나에 : 죄송합니다. 카나코님. 제 마음이 너무도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당신의 신앙을 모으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저는 자유의지를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제 삶은 오롯이 저의 것이며 당신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땅엔 이미 이성과 과학에 기초한 사회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호혜가 없더라도 21세기의 톱니바퀴는 돌아갑니다.

 

이제 당신이 실존하는 존재이든 정말 저의 환각이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대답은 너무도 초라합니다.

당신 말이 모두 참이라면 당신의 생사여탈권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신자인 제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까?

불투명한 약속의 땅을 택하느니 이제라도 제대로 된 삶을…….

 

 

사나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빛은 이미 사라지고 노을이 창문을 두드린다.

 

 

사나에 : 안녕히 계세요, 카나코님. 가능하다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덜컹대는 미닫이 유리창을 열어젖히고 사나에는 경내로 나선다.

우수에 찬 눈빛으로 본전 건물을 향해 가벼운 목례를 하고, 잰걸음으로 토리이 밑을 빠져나간다.

 

 

 

S#7 읍내 / 낮

 

구름 낀 하늘에선 싸락눈이 내린다. 눈 구경하러 나온 아이들과 눈 치우러 나온 어른들로 거리가 소란스럽다.

카페테라스의 수다스러운 여학생 무리 사이에 끼어있는 사나에. 목도리를 하고 신사가 있던 공터를 바라본다.

 

 

A : (능글맞게) 왜 그래, 거기 뭐 있어? 너 아직도 이상한 거 보냐?

 

 

친구 사이로 보이는 A가 커피를 들고 사나에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건다.

 

 

사나에 : (미소를 지으며) 뭔 소리야, 이젠 안 그렇다니까. 그냥 예전에 저기 작은 신사가 있지 않았나 싶어서.

 

B : 아~ 있었지. 뭐 짓는다고 철거했나 보네.

 

사나에 : 응, 그러게.

 

 

이윽고 공터를 향한 눈길을 거두고 다시 잡담에 빠져드는 사나에.

사나에의 모습 뒤로 공터가 클로즈업되며 영화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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짭알못 팬픽대회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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