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가 있지요, 저기 산 너머에. 호수에는요, 아침에 일어나면 하얀 안개가 매일같이 깔려요. 그래도 앞이 안 보일 걱정은 안 하죠. 햇님이 뜰 참이면은, 안개가 봄날 눈처럼 녹아내리거든요. 가장자리 숲에 사는 늑대 씨가 있는데요, 늑대는 달님이 솟아나도 잠이 안 온다나 봐요. 그 늑대 씨는 아침마다 호수에 물고기들 밥을 챙겨 주거든요. 그럼 늑대가 바구니 들고 안갯눈 밟는 사박소리에 나도 잠에서 깨요.
호수에 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알거에요. 나는 날 때부터 호숫가에 살았거든요. 호수에는 인어도 살구요, 개구리도 살구요, 뱀도 살구요, 지나가는 새들도 꼬옥 한 번씩 들러서 목을 축이고 가요. 뭐든지 다 있어요, 우리 호수에는. 나무들도 물이 좋은지 다 호숫가로 모여들더라고요. 그 덕분에 나는 맛난 과일을 먹기 편해서 좋죠. 시월만 되어봐요. 예쁜 단풍들 사이사이로 석류니 감이니 죄 맺히거든요. 그러면은 친구랑 과일을 따다가 안에 씨앗이 몇 개 들었나를 가지고 내기를 하고 놀죠. 주인이 없는 나무니 아무나 먹어도 괜찮아요. 뭐라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참, 친구 소개를 여태 깜빡하고 있었네요. 치르노라는 애인데요, 그 얄개는 꼭 동물들한테 장난을 치다가 숲속 어르신들한테 혼쭐이 나요. 덤벙대기는 세상에서 제일이고 까불기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말썽쟁이예요. 그래도 걔랑 놀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하루가 짧은 게 아쉽다니까요.
맞아, 걔가 딱 한 번 아주 호되게 혼난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자면 저번 가을이었는데요. 바깥동네에서 저 산 위로 신님들이 이사를 왔다는 걸 치르노가 마을에 가서 들었대요. 산이랑 호수는 이어져있어서,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물이 호수가 되는 거거든요. 그니까 산이랑 호수는 기실 한동네지요. 우리 고을에서는 외지인이 처음으로 들어오면 떡도 돌리고, 들턱도 내고, 하다못해 새 이웃한테 인사는 하러 오는 게 예의라고 해요. 그러니 치르노가 대뜸 이사 소식을 전하면서 ――
“그래도 우리가 여기 먼저 살았으니까 뭐라도 들고 오겠지?”
한 것도 이해가 가지요. 웬걸, 모리야라는 이방인은 호숫가에 코빼기도 내밀질 않았지만 말이에요.
아마 그때부터 치르노는 산 위의 신님들을 고깝게 본 것 같아요. 하루가 멀다 하고 걸핏하면 외인의 신수라는 개구리를 붙잡아다가 얼려댔다니까요. 그 신님들한테는 동티가 안 난 게 다행이지요. 무어, 지벌이야 우리한테 내렸는지도 모르지만요. 나는 아직 어린애라 잘 모르겠어요.
그래, 이 얘기도 해야겠구나. 뭐든지 다 있는 우리 호수에는 사실 멋진 양관도 한 채 들어섰거든요. 이름이 홍마관이라고, 빨간 마녀가 사는 저택이래요. 온지는 5년쯤 됐죠.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젤로 경치 좋은 섬에다가 떡하니 터를 잡더라구요. 그 집 사람들도 바깥에서 왔는데, 그 양반들만큼만 했어도 모리야님이 호숫가 주민들한테 처음부터 미움을 사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홍마관이 호수에 온 맨 첫 날, 난데없이 섬에 으리으리한 집이 뚝 하고 생겼으니 다들 구경을 하러 갔어요. 그 집 사람들은 먹물이 들어서 그런가, 저들이 믿는 지신님한테 이 땅을 산다고 고하고, 흙바닥에다가 돌림버꾸랑 오망성을 정성껏 그리더니만, 돼지도 잡아 의례를 올리더라구요. 아, 이 사람들은 땅과 신을 공경하는 예의를 아는 사람이다 싶었지요. 잡은 돼지고기도 얻어먹었으니 이웃으로 삼아줘도 되겠구요. 원체 내외가 없는지라 허물없이 친하지는 않음서도, 기분이 나쁜 이웃은 아니었어요. 근데 모리야는 감감무소식이니 다들 쌍것들이라고 안 좋은 말을 했죠.
그렇게 모리야가 오고 보름이 지났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리야고 자시고 진즉에 다 잊었지요. 근데 홍마관에서 우리들 보고 긴한 이야기가 있으니 저녁에 모여달라 하더래요. 여지껏 오라 가라 말은 없었는데 갑자기 모이라니까 무슨 잔치라도 벌이나 해서 다들 삼삼오오 몰려갔죠. 정원에 들어가니까 메이드라는 작자가 나오대요. 해서 다들 잔디밭에 앉아가지고 무슨 말을 하려나 구경하고 있자니까 ――
“호숫가 주민으로서 말씀드립니다. 산 위의 모리야 신사에서 이번에 핵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저희는 그 개발 계획에 협력하기로 했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는 어떠신지요?”
라는 생뚱맞은 말이 튀어나오더라구요.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있어야죠. 좌중에서는 곧장 ――
“그게 무슨 소리요? 개발이 대체 뭣이요?”
라는 물음이 터져 나왔지요. 그러자 메이드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내짓더니, 헛기침을 큼큼 하고서는 ――
“에너지는 우리 환상향의 삶을 증진시켜주고 호숫가에는 터빈이 설치되어 전기와 같은 문명의 이기를……”
하고 장황한 공약을 내걸더래요. 눈치를 보아하니 웅변자로 나왔을 뿐, 뭐가 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말허리를 끊어먹히고 또 ――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는 그만 하소, 전기니 과학이니 바깥 문물들이 싫어서 쫓기고 쫓기다 겨우 발붙인 게 여기 환상향 땅이요. 그런 것들일랑 진절머리가 난단 말이오. 더군다나 개발이고 뭐고 하겠다면야 모리야가 제집 마당에다 제멋대로 하면 되는 지산데, 우리한테 구태여 허락을 받는다는 얘기는 뒷구멍이 구려서 그런 거 아니오?”
하는 걸쭉한 볼멘소리 대꾸가 마당을 울리기 마련이었죠.
그 뒤로도 몇 마디 더 오갔는데, 이야기할 만큼 좋은 말은 아니었어요. 대담을 끝난 마지막 말이 진국인데요. 그게 그러니까 ――
“애초에 당신들이 언제부터 ‘우리’였소? 흘러들어온 이방인 주제에!”
라는 일갈이었죠. 그 말을 들은 메이드는 가타부타 말이 없더니 홀연히 사라졌어요.
우리는 볼 장 다 봤다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호숫가로 돌아갔죠. 나도 에너지라는 말이 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홍마관 사람들 참 나쁘다, 그치?' 하고 거들었어요. 그 날 이후로부터 섬이 퍽 멀어 보이더라구요. 그래도 예전에는 자주 놀러 갔는데.
치르노는 바보에요. 바보는 어른들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지요. 평소에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순 장난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거예요. 어른들이 치르노는 약빠른 요즘 애들 같지 않고 순수한 게 장점이래요. 그 순수한 바보 치르노가 의미도 모르고, 홍마관 말씨름 다음날부터 어른들이 모의하던, 반 홍마관 타도 모리야 타령까지 앵무새처럼 주워듣고 따라 부르던 게 사달의 실마리였죠.
며칠이나 지났었더라? 아주 하루 일과처럼 개구리를 얼리러 다니던 치르노랑 모리야의 신님이 기어이 마주쳤어요. 산 중턱 두꺼비 연못이었죠. 그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처음에는 누군지도 몰랐어요. 신님은 우리들 옆에 말도 없이 다가와 서서, 얼음 속의 개구리를 마뜩잖게 쳐다보고는 ――
"왜 개구리를 괴롭히는 거야?"
라고 묻더라고요. 키는 우리처럼 쬐끄만데, 주변의 신위가 으스스하니 대번에 신님인 걸 알았지요. 아뿔싸 하고 말리려는데 바보 치르노는 아무것도 모르고 ――
“모리야라는 놈들이 개발이라는 걸 한다잖아! 거기선 하찮은 개구리를 신으로 모신다니까, 잡아다가 복수를 해줘야지!”
하는 군소리를 내뱉고 말았어요. 신님 모자에 달린 눈알이 팽그르르 굴러갔으니, 이미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기엔 늦어버렸지요.
그 뒤로는 한동안 이런 대화가 이어졌어요. 촌철살인의 연속인지, 중언부언의 되풀이인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그냥 들은 순서대로 요약하자면요 ――
“모리야가 개발을 왜 하면 안 되는데?”
“그걸 하면 우리가 살 곳이 줄어든다고 어른들이 그랬어!”
“명백한 증거는 있는 거야? 이번에 도입할 기술은 자연을 더럽히는 게 아니야. 다만 호수의 물이 약간 필요한 정도지. 공공재를 쓰기에 앞서 허락까지 구하고자 했잖아?”
“몰라! 어려운 말도 하지 마! 결계 바깥에선 기술 때문에 살 곳이 줄어들다 우리들이 영영 사라졌다고 하는걸! 그러는 너는 왜 모리야 편을 드는 건데?”
“모리야의 개발은 환상향을 좀 더 낫게 해줄 테니까.”
“여기서 뭘 더 낫게 한다는 거야? 난 지금 우리 동네가 제일 좋아. 꽃도 있고 물도 있고 친구들도 있는걸. 이거면 충분해.”
“이를테면, 정상과 기슭을 잇는 전동차를 만들 수 있겠지.”
“헹, 우리는 날개가 달려있는데 전동차가 다 무슨 소용이람?”
“너는 너희들밖에 생각하지 않는구나. 날개가 없는 마을 사람들은 산길을 걸어 오르라고? 기술의 발전은 곧 복지야. 신통력에도 한계는 있잖아.”
“복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산에 오를 이유가 뭐가 있는데? 결국 모리야는 자기 세력만 넓히려고 그러는 거야. 지금도 사람들은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데, 새로운 무언가에 맛들이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 하겠지. 욕심쟁이!”
“비단 그런 것에만 기술이 쓰이는 건 아니야. 만에 하나 여기가 누군가에게 침공당한다면, 그때는 신통력뿐만 아니라 과학기술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 핵융합 발전소는 그 모든 열량을 제공하는 에너지원으로 기능할 거야. 요정은 유비무환이라는 단어를 아나?”
“흥, 내가 아무리 바보여도 이거는 알아. 환상향은 잊혀진 것들의 낙원이랬어. 바깥세상의 뛰어난 과학기술? 그게 우리가 지켜야할 물건이야?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대로 살아가면 돼. 누가 쳐들어와도 우리가 싸우던 방식으로 싸우면 돼. 그게 우리의…… 그러니까…… 그래! 보편적 가치야! 이 이방인!”
…… 치르노가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지요. 혼날 만 했어요. 요정은 흥분하면 주변의 자연을 사납게 하거든요.
그걸 눈치 챈 신님이 제지해 꿀밤을 때리니까 치르노는 그대로 기절했어요. 연신 사과를 드린 뒤, 친구를 업고 호수까지 내려간 건 순전히 내 몫이었죠. 그 다음부턴 어째서인지 걔도 개구리에는 흥미를 뚝 끊더만요. 모리야 개발 소식도 잠시간 흐지부지되었고요.
나중에 어떻게 됐냐고요? 선생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핵융합 발전소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전동차는 참배객을 태우고 뺀질나게 산을 오르내리고 있어요. 누구는 모리야가 우리를 포기하고 지옥 까마귀한테 핵융합의 힘을 줬다고도 하고, 누구는 아직 산에서 남몰래 개발 중이라고도 해요. 또 누구는 홍마관에 산 요괴들의 시체들을 실은 수레가 들어가는 걸 봤다고도 하고, 누구는 홍마관도 잘 모르고 그런 거라고 사이좋게 다시 지내자고 하대요.
소문은 안개처럼 무성하지만, 호수는 오늘도 변함없이 평화로워요.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겠죠?
제3회 동방 모티브 팬픽대회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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