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십삼계 정월

인간 사 명 불상사,

이상 식사 끝.

 

환상향에 특기할 일은 없었다.

이상 토사 끝.

 

 

백이십삼계 이월

인간 칠팔 명 불상사. 인원 불확실.

이상 식사 끝.

 

환상향에 특기할 일은 없었다.

이상 토사 끝.

 

 

백이심삼계 삼월

인간 오 명 불상사. 경칩 뒤 현황 보고. 새 인간 이십오 명 입향 조치.

이상 식사 끝.

 

환상향에 특기할 일은 없었다.

이상 토사 끝.

 

 

백이십삼계 사월

인간 오 명 불상사. 새 인간 십이 명 입향 조치.

이상 식사 끝

 

환상향에 특기할 일은 없었다.

이상 토사 끝.

 

 

백이십삼계 오월

인간 육 명 불상사. 새 인간 십 명 입향 조치.

이상 식사 끝.

 

환상향에 특기할 일은 없었다.

이상 토사 끝 …….

 

백이십삼계 팔월

인간 구십구 명 불상사. 새 인간 백 명 입향 조치.

 

 

 

사관은 논한다

 

 

 

  대서大暑 무렵이었다.

  무더위가 심한 덕에 초록은 시리도록 무성했다. 절기가 토용이니 방죽 장어가 죽어나갔다. 억수장마는 물러가 타고난 농사꾼들은 궂은일에 바빴다. 땀 뒤에 남은 짬은 우치미즈 제례 준비에 고스란히 돌아갔다. 흙먼지 자욱한 농로를 연장 매고 돌아가며, 천하지대본이 농자일진대 땅에다 물이나 좀 끼얹고 마는 우치미즈가 무슨 대수냐고 볼멘소리를 내는 자도 더러 있었다. ‘이 양반 지벌 맞을 객설을 하네. 아니 신령님들 가시는 길인디 말이여, 정한수를 길어다가 고이 뿌려 먼지 없이 정갈히 하는 게, 그게 얼마나 중한 뜻인지 모르는겨?’ 하는 꾸중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꾸중하는 중늙은이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진 못했다.

  다만 사람들의 삶 속에는 이미 신령들이 가득했다. 눈에 보이는 도력이 있으니 믿지 않을 까닭도 없었다. 어린 무녀는 신통력을 부려 날아다녔고, 요정들의 객쩍은 장난질도 으레 있었다. 무구를 치렁치렁 단 신님이 마을로 내려오신 날에는, 흙바닥에 바짝 엎디어 조아리지 않으면 경을 치렀다. 그래도 그분들 덕분에 올해 추청미도 고개를 숙여가지 않는가. 올봄엔 완두콩도 아주 실하게 영글었으니, 벼이삭도 필시 무거워져 갈게다. 다 그분들 덕분이다. , 그렇고말고. 내일 제례도 정성껏 봉헌해 신명님들이 흠향케 해야지. 다 그분들 덕분인걸. 절거덕절거덕 쇳소리를 내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절로 가벼워진다.

 

  제삿날이었다.

  신심 깊은 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산 위 신사로 향했다. 우치미즈는 애당초 시제에 들어가지 않는 잡사雜祠니 마을사람들이 죄 모이진 않았다. 신들의 은덕을 가슴 깊이 믿는 자들이나 산적이니 백설기니 삼색실과니 제수품을 보에 싸안고 잰걸음으로 산길을 오르는 날이다. 젯밥에 눈이 먼 배고픈 아이들도 음복이나 떨어지지 않을까 뒤따르곤 했다. 사내들은 새벽부터 사슴을 잡아왔고, 아낙네들은 상차림에 분주하였다. 이윽고 오시午時가 되자 의식을 알리는 흰 깃발이 중문 앞에 세워졌다. 나부끼는 깃발을 보고, 배전 회랑 그늘에 늘어선 사람들은 배를 올렸다. 그 배를 신호로, 홍백으로 곱게 차려입은 무녀가, 요사에서 배전과 본전 사이 마당으로, 사뿐히 걸어왔다. 입에 문 하이얀 하미가 엷게 떨렸다. 무녀는 제수 앞에 꿇어앉아 고헤이御幣를 치켜들고 축문을 읊었다. 좌중은 신령스러움에 압도된다. 온 시선이 집중되고 사위가 고요해진다. ‘은총이 가득하신 무녀님 기뻐하소서! 온갖 신명들이 무녀님과 함께 하나이다.‘ 마음속으로 찬미의 기도를 읊는 자도 적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거룩하고 신실한 자리였다. 그리고, 재앙이 찾아왔다.

 

  지진이었다.

  최초 수 초 간은 흔들림이 미약했다고 전한다. 지진이야 이 고을에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하물며 이곳은 신성한 신사 경내지 않는가. 하잘것없는 지변이야 도통하신 무녀님과 지고하신 신명님들께서 그쳐 주리라는 굳센 믿음이 사람들에게 있었다. 게다가 뛰쳐나가자니 본전 신역神域을 거스름이 두려웠다. 모든 사람들은 동요했으나, 이윽고 마음을 다잡고 기도에 열중하였다.

 

  격진이 습래했다.

  미약하던 흔들림이 굉음과 함께 격해지고, 사람들은 휘청거렸다. 젖먹이를 끌어안고 주저앉은 여인, 쓰러진 장정에 깔려 짓눌린 아이, 회랑 기둥을 붙들고 신을 찾는 늙은이들이 그 짧은 수라장 속에 있었다. 온 천지가 진동하고 산이 울었다. 제물을 사냥해온 사내는 그 틈바귀 속에서 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사슴을 떠올렸다고 한다. 도사리는 공포에 저항하는 애탄 몸부림을. 사슴의 시뻘겋게 충혈한 눈자위를.

 

  그 뒤로는, 아비규환이었다.

  격진으로부터 몇 초 후, 신목으로 지었다던 회랑건물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뭇 사람들이 수천 근에 달하는 기왓장과 서까래 밑에 깔렸다. 지진은 잦아들었으나 어린 무녀는 겁에 질려 재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잔해 속에서 비명과 신음이 울리고, 차츰 꺼져갔다. 너덜대는 몸뚱이들이 신역에 제멋대로 나뒹굴었다. 동생이 없어졌다고 울어대는 앳된 아이, 머리가 깨져 널브러진 산송장, 흙먼지와 피가 섞인 매캐한 아우성... 용케도 매몰되지 않은 이들은 기왓장을 미친 듯이 걷어냈다. 하지만 육중한 용마루는 사람의 힘으로 들어낼 길이 없었다. 신사에만 국한되었던 지진이었던 탓에, 구조 인력도 매우 늦게 파견되었다. 괴력을 지닌 요괴들 귀에 소식이 들어간 뒤에야, 겨우 중상자와 시신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 장장 여섯 시간이 걸렸다.

 

  상여소리였다.

  근 백 명이 명을 달리했으니 온 마을의 초상이었다. 상제喪祭의 예를 아는 어른들이 많이 죽어 장례가 서툴렀다. 허나 예법에 어긋났을지언정, 도리에 어긋난 행동은 없었다. 모든 이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곡소리와 문상이 끝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급조한 아기상여에 염습한 시신들을 태웠다. 열 대의 상여가 줄지은 발인 길은 미련처럼 길게 늘어졌다.

 

돌아오지 못할 길 북망산천이란다……

울어다고 울어다고야 섧게 섧게야 울어 나다고……

못 잊을래 못 잊을래 차마 진정 못 잊을래……

너를 두고서 가는 내 몸이 차마 진정 못 잊는다……

에헤야 어이어햐 에이헤헤야……

 

  돌담을 돌아가는 상여소리를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고인이 남은 자들을 잊지 못하리라는 뜻인지, 남은 자들이 고인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질문이 던져졌다.

  장사가 끝나고, 평소보다 서당이 북적였다. 여러모로 바뀐 환경에 면학 분위기도 어수선했고, 나도 정신적으로 피로감과 압박감을 느끼던 참이었다. 수업을 파하고 강당 뒷정리를 하던 내게, 유키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가 결연히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제 부모님과 동생은 왜 죽어야만 했나요?”

 

  유키는 상을 치르고 막 서당에 돌아온 어린 상주였다. 상여꾼 뒤에 지팡이를 짚고 상여소리를 부르기엔 너무도 가녀렸다.

 

제 아버지께서는 아주 성실하신 분이셨어요. 해가 뜨면 논밭을 일구러나가 달이 떠야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정말 자상하셨지요. 삯바느질부터 동생 보기, 텃밭 가꾸기에 밥 짓기까지 하시면서도 힘들다 하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동생은 이제 막 글을 배우던, 아무것도 모르는 애였어요. 나이 터울이 좀 있어서 엄마가 일하실 땐 저도 많이 봐주곤 했지요. 그리고 부모님께선 신명님도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밥 먹을 때마다 쌀 한 숟가락씩 신단에 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신사에서 대소사가 열릴 때마다 일손을 도우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저희 가족은 신사에서 몰살을 당한 거지요? 무슨 잘못을 했길래 행복을 앗아가신 거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로 질문은 쏟아낸 소녀는 입술을 앙다문 채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맑은 눈망울이었다. 이내 눈망울에 물기가 어려 쏟아져 내린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마을에 소문이 돌아요. 지진은 유정천에 사는 천인님이 변덕으로 일으켰다고. 전지전능한 천인님이 왜 사람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진을 일으켰죠? 거기 깔려 죽는 사람들은 무슨 잘못이 있는데요?”

 

  소녀는 울먹이며 하소연을 토해냈다. 진실로 그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람 된 도리로 해서는 안 되었다. 그저 묵묵히 소녀를 안아주며, 함께 가슴으로 울었다. 소녀는 내 품안에서 목 놓아 울었다. 내 눈에도 뜨거운 것이 어리었다.

 

 

 

  팔월 보름이다.

  나는 잡종이다. 요괴가 되다 만 지진아요, 인간은 되지 못할 돌연변이다. 반인반요 튀기로 태어난 나는, 요괴에게선 괄시와 멸시와 백안시를, 인간에게선 기피와 혐오와 경외를 받아왔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부인에겐 세상이 서러웠다. 천한 삶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선 하나의 정체성을 도려내야 했다. 때마침 환상향에 흘러들어 온갖 것이 생경하던 시절이었다. 현자는 내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이곳은 바깥에서 잊힌 것들의 유일한 안식처이고, 현상 유지를 위해 인간들이 필요하다고. 스러져가는 것들 중에는 인간을 연료로 삼는 자들도 있지만, 인간이 죽어나가서야 민심이 요동치리라고. 네 역사를 숨기는 능력으로 이 아름다운 낙원을 비호해달라고. 돌팔매질을 맞지 않아도 되는 보금자리가 너무도 고팠던 나는, 인간을 저버리고 요괴이고자 했다.

 

  역사는 취사선택의 연속이다. 역사가가 선택한 사실만이 역사가 되어 사서에 남고 기억된다. 역사가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유가치한 역사를 골라낸다. 가치관은 역사가의 주변 환경이 형성한다. 환상향이라는 환경은, 현자의 부탁은 내게 암묵적으로 요괴에게 유리한 가치관을, 역사관을 강제했다. 보름날마다, 요괴들이 인간을 사냥한 사실은 집어삼켜 없애면 그만이었고, 신들이 이따금 과시한 호혜는 대서특필하면 제격이었다. 재편된 역사는 세상마저도 재단했다.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신과 요괴를 존경하고 또 두려워했다. 환상향의 권력구조는 그렇게 공고해졌다. 낙원 속의 나락은 그렇게 체계화되었다. 문제 제기는 애당초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올바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소임을 도맡을 뿐이었다. 인간 인구의 감소는 나조차도 감출 수 없으니 염려되었으나, 틈새를 넘나드는 현자님은 보름날마다 줄어든 머릿수만큼 인원을 충당시켜주었다. 만족스러운 나날이 한동안 이어졌다.

 

  십 년 전일까, 유난히 잡귀들의 가을걷이가 심하던 해였다.

  성인을 잡아먹길 좋아하는 잡귀들이 한바탕 준동하니, 부모 잃은 고아들이 속출했다. 거지꼴이 된 고아들이 주린 배를 채우러 동냥을 나섰다. 역사를 없애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인간이 사냥당한 역사를 지워버리면, 저 고아들은 가족에 대한 기억도 깡그리 잊을 것이다. 애초에 고아였으니 결여된 존재를 그리워하고 슬퍼해 할 이유도 사라진다. 달이 차오르기까지 열닷새만 기다려 달라 빌었다. 그 열닷새 동안, 태반의 원죄 없는 아이들은 길가의 시체가 되었다. 깜빡일 힘도 없어 눈을 부릅뜨고서는, 까마귀가 쪼아대는 고깃덩이가 되었다.

 

  그제야 나는 내 가치관의 의미를 깨달았다.

  한 달 중 보름날을 제외한 29일을 인간으로 살아가는 내가, 인간의 마음을 포기하고 요괴에게만 부역하며 살았다는 그 사실이, 내게는 너무도 소름끼쳤다. 미안함, 죄책감, 자기혐오, 그리고 자기합리화……. 구역질을 할 때마다 고깃덩이가 된 아이가 떠올랐다. 토사물을 볼 때마다 멸시와 천대로 가득한 과거가 떠올랐다. 나는 이미 안락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붓을 들 힘이 없었다. 난 처음으로 내 일을 다하지 못했다.

  그 달, 인간들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시장에 방이 나붙고 분규가 일어났다. 결과는 살육이었다. 요괴와 신을 믿지 않는 이교도는 철저히 제거되었다. 맡은 바를 행하지 못한 이유를 문책하러 현자가 여러 차례 집을 방문했다. 다음 달에도 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살육의 창끝이 내게 향하리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 와중에도 보신을 우선한 이 잡것은, 깊은 우울감과 혐오감에 빠져, 먹을 갈아 붓을 적셨다. 벼루에 자꾸만 눈물이 괴였다. 눈물은 층을 갈라 먹과 섞이지 못했다. 그렇게 밤새 울며, 요괴만을 위한 역사를 기술했다.

 

  열병을 앓고 나는 서당을 지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거둬들여 잘 곳을 마련해주었다. 농사법, 역법, 천문 의학 셈법 화술……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식들을 최대한 알려주었다. 그게 내 속죄의 길이자, 내게 내미는 최소한의 위안이었다. 가르치는 아이가 적을수록 기쁜 서당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유키도 이제 날 때부터 천애고아였던, 서당의 하숙생이 될 터이다.

  유키의 가족에겐 아무런 죄도 없다. 실없이 던진 돌멩이에 우연히 맞아 죽은 개구리처럼, 우연히 환상향에 태어나거나 끌려온 것이 죽음의 까닭이었다. 날조된 역사의 톱니바퀴에 윤활유를 바르던 내가, 감히 네 가족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었다고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모든 진실은 내가 떠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유키의 질문에 대한 나의 변명이자 해답이다. 내일이면 또다시 세상이 바뀐다. 신앙과 축복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환상향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순덩이 세상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이 역겨운 논설마저 식사할 테니.

 

이상 食史 .

 

723, 하쿠레이 신사에 큰 지진이 있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천인과 무녀가 협력해 신사를 재건했다. 이외에 특기할 일은 없었다.

 

이상 吐史 .

 

 

慧音家藏史草

 

 

 

 

 


 

케이네는 역사를 먹어치우고 날조하며 어떤 고민들을 했을지 생각하며 써보았습니다.

食事와 食史, 吐瀉와 吐史라는 말장난에서 착안해봤는데, 어떠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제2회 글알못 팬픽 대회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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