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여러분들로부터 청원문을 받고 저는 매일 새벽 산에 다녀왔습니다.

 

3시 즈음 이불을 개다보면 차가운 새벽 달빛이 창호지 밖에서 서성거립니다.

고요 속에 잠긴 세상을 관조하며 창문을 열어젖히면 그제야 연한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집니다.

집 나설 채비를 합니다, 많은 짐은 필요 없습니다.

어제 빻아둔 미숫가루를 보에 담아 허리에 차고 문을 닫습니다.

 

적막한 마을에선 별이 지나가는 소리마저 들릴 듯합니다.

달빛은 어슷했지만 제 길을 찾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아직은 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어두운 산으로 향합니다.

길은 멀지만 실바람이 불어 개운합니다.

 

새벽 흙은 물기를 머금어 푹신합니다.

따사로운 햇빛 아래 흙이 알맞게 바스락거린다면, 새벽 흙길은 부드러운 양탄자 같습니다.

밤벌레 소리를 벗삼아 흙길을 따라 걷습니다. 밤에는 포장된 거리보다 흙길이 마음 편합니다.

 

걷다보니 사위에 건물들이 드문거리고 산의 전모가 드러납니다.

개울에서 목을 축이며 잠시 쉬어갑니다. 계곡물이 가장 시원할 시간입니다.

 

산기슭에 접어드니 달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옵니다.

검은 하늘에 알알이 박혀있던 별들이 푸르스름한 빛깔에 색을 잃어갑니다.

그 별빛과 함께 밤도 서서히 저물어갑니다.

 

호젓한 산길은 짐승들이 닦아놓아 드나들기 편합니다.

짐승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온갖 요괴와 신령도 숨죽이며 기나긴 밤을 즐기고 있습니다.

사람들만 아직도 단잠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밤과 낮이 교차하는 지점, 닭 한 마리가 수차례 홰를 치며 온 산에 새날을 알립니다.

새벽잠이 없는 메아리는 댓바람부터 기운차게 화답하다 마을 사람들을 깨워 스님에게 혼났는지 그 재미난 대답을 못 들은지 오래입니다.

 

하늘 조각을 가로지르며 까마귀가 신문을 나릅니다.

아직 사위가 어두운데 부지런한 이들을 보니 저절로 흐뭇해집니다.

 

목적지였던 산 중턱 신사에 도착했습니다.

그제야 해가 산등성이 위로 떠오릅니다. 해기둥이 조각구름을 헤치며 창연하게 일어섭니다.

일찌감치 일어난 무녀는 마당을 쓸다 저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저도 반갑게 인사하며 미숫가루를 풀어 마실 물 한 잔을 청합니다.

무녀와 함께 대청에 앉아 풍경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바라봅니다.

 

신사는 산에 있지 않고, 산을 신사가 안고 있습니다.

발 아래로 펼쳐지는 어둑한 새벽 산을 내려다보니 절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모두가 움트며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경이로운 시공간입니다.

 

 

새벽은 이토록 아름답습니다.

새벽은 이토록 평화롭습니다.

새벽은 없어져선 안 됩니다.

 

 

여러분은 새벽을 요괴와 짐승의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며 제게 새벽이라는 단어의 역사를 감추어달라고 제언하셨습니다.

저는 단어의 역사를 감춰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초래할 결과가 두렵습니다.

단어는 언어를 구성합니다. 언어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규정합니다.

일정 단어의 역사를 감추면 아마 환상향의 상식도 뒤바꿀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새벽이 없어지고 곧바로 아침이 된다면 요괴들의 준동이 적어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새벽이라는 단어를 없애 모든 이들이 새벽을 누릴 기회와 자유를 박탈당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도 본디 새벽에 움직이는 짐승이었습니다. 다른 짐승들보다 일찍 일어나 사냥하고 채집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무리를 짓고 정착해 농경을 시작하자, 새벽이라는 개념은 희박해지고 아침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사회를 건설한 대가로 인간은 잠 잘 시간을 얻고 새벽이라는 시간을 잃어갔습니다.

짐승과 요괴들, 신령과 초목들에게 아침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인간과 가까워 인간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도 새벽에 일어나는데 하물며 천지만물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새벽은 여전히 누군가에겐 중요한 시간입니다.

새벽은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새벽은 여전히 생산적이고 불가결합니다.

 

 

아직도 새벽에 대한 의심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빛이 어슴푸레한 첫새벽에 집을 나서보시기 바랍니다.

바람은 차고 멀리서 짐승이 울어댈 터입니다.

그 두려움을 제치고 마을 한 켠의 다랑논으로 가시길 권합니다.

 

금빛 무논에 검푸른 산이 일렁거립니다.

논두렁을 액자삼아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수채화가 시시각각 변해갑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무렵엔 검은 산이 논에 녹아들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빛이 조금씩 서리면 새벽 이슬과 함께 벼들이 녹두빛, 산빛으로 물들어갑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벼를 춤추게 하니 제 마음에도 즐거움이 깃듭니다.

아침이 가까워오면 산은 제 빛을 되찾고 신록을 자랑합니다. 벼도 질세라 황금빛 물결을 일으킵니다.

 

바람과 소리와 별과 달이 함께하니 이보다 더 좋은 미술관이 없습니다.

인간이 가꾼 논에 요괴들의 산이 비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인간과 요괴는 이렇듯 언제나 기쁘게 공존해왔습니다.

우리가 다시 믿음을 되찾고 새벽을 다함께 맞이할 때에, 술이라도 한잔 기울이며 지는 달과 뜨는 해에 건배했으면 합니다.

 

저는 새벽이라는 단어를 지우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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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네의 서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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