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야님께서 삽화를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고운 달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달을 담은 하늘은 짙푸르게 익어간다.

비쭉 솟은 뿔 두 개가 연신 달을 찔러 빛이 바스라진다. 그 뿔 밑동에 달린 리본이 앙증맞아 제법 귀엽다.

 

“어디서 이런 술을 구했어? 일품인데!”

 

“저번 단옷날에 빚어뒀어, 배웠지. 옛날 사람들한테.”

 

"아, 이게 창포 향기였구나. 네가 직접 빚은 거라고? 이야, 솜씨가 대단한데?"

 

오니 옆에는 소녀가 둥근 술잔을 들고 앉아있다. 질끈 동여맨 머리가 달밤엔 더욱 하얗다.

잔바람이 마루를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해가 길어지고 날이 서늘한 초여름 밤엔 몸을 데우는 술이 제격이다.

간만에 마시는 술이 싫지는 않은지 소녀도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오늘은 운이 좋아! 길을 헤맨 덕분에 이렇게 멋진 친구를 만나고, 좋은 술까지 대접받고!"

 

"길 잃은 사람이 초면에 술까지 내어달라고 성화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너는 부탁을 거절할만한 성품이 아니야! 그리고 술은 친구 사이를 돈독하게 하지! 그…… 이름이 뭐랬지?"

 

"후지와라노 모코우, 술상 내온 친구 이름을 그새 까먹나."

 

"그래! 모코우! 오늘은 술이나 마시고 하루를 잊자고!"

 

 

 

 

밤은 오가는 핀잔과 취기로 이슥해져간다.

안주로는 죽순무침과 참새구이, 절임 몇 가지가 상에 올랐다. 오니는 어느새 얼굴이 불콰해졌다.

 

"아니 근데 창포주 만드는 법을 어디서 배웠나? 왜 여기 혼자 살고?"

 

"…… 다 풀려면 제법 긴데, 괜찮겠어?"

 

소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좋고말고! 혓바닥은 짧아야 좋지만, 안주상 이야기는 길수록 좋다잖아!"

 

"나 참, 성격 한 번 좋네……. 음, 벌써 천 년도 더 된 이야기지."

 

"천 년? 에이, 전래동화는 재미없는데. 내가 살던 세상 얘기잖아. 다 아는 거라고. 아니면 네가 천 년을 넘게 살았다는 말이야?"

 

"그렇게 되었지."

 

소녀가 다시 말을 고른다. 짐작건대 치미는 술기운을 삭이고 있는 것이리라.

오니는 고개를 돌려 소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망울 속에 침전한 세월이 언뜻거렸다.

치뜬 눈은 달을 쏘아보고 있었다. 눈동자 속 보름달은 사무치게 슬펐다.

물기가 감돌자 달이 이지러진다. 달 없는 밤이 달갑지 않은 오니는 화제를 바꾸려했다.

 

"내 정신 좀 보게, 아이고, 농담 한 거 다 알아! 그 이야기는 됐어. 이야…… 달이 밝구나. 내일은 새벽이슬이 탐스럽겠네."

 

소녀는 젖어오른 눈가를 옷소매로 비벼 닦고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뽀얀 얼굴은 한없이 앳돼 보였지만, 한숨에선 기나긴 세월이 묻어나왔다.

허리를 꼿꼿이 곧추세우고, 소녀는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나도 이야기를 해야 잊질 않지. 살아온 날은 긴데, 기억력은 남들과 같으니 잊으면 안 되었을 잊은 것들이 너무 많아"

 

"나랑 똑같구나! 옛날엔 같이 놀던 친구들도 참 많았는데…… 호시구마랑 이바라키는 여기서 재회해 망정이지. 같이 놀던 카네구마나 토라구마 얼굴은 한동안 가물거리더니만, 이젠 영영 기억이 안 나. 이번에도 행여나 만날까 올라와봤는데……"

 

잠시 대화가 끊긴다.

풀벌레도 숨을 골라 고요한 사방에 별과 달의 거친 숨소리만 뚜렷하게 울려 퍼지고, 밤바람에 춤추는 시꺼먼 댓잎 그림자가 선득했다.

바람이 차니 몸을 덥혀야 했다. 오니는 연거푸 술을 들이마시고 구멍이 뻐끔 난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몸을 뉘였다.

 

 

 

 

"저 달에 대한 이야기야."

 

침묵은 소녀가 깼다.

소녀는 어느새 짧은 궐련을 입에 물고 있었다. 가녀린 검지 끝에서 화르르 도깨비불이 일더니 이내 꺼진다.

깊게 한 모금을 빨아 마시더니 후우…… 하늘거리는 잿빛 연기는 갈피를 못 잡고 공기 중을 떠돈다.

낮에 비가 온 탓에 연기는 승천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남아 몽글거렸다.

연기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길도 초점을 잃고 희미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요괴구나."

 

"인간이야. 그렇게 믿고 있어."

 

돌아온 대답이 아리송해 오니는 눈알을 굴리며 담배 연기를 좇았다.

낮게 깔린 연기는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안개처럼 흩어졌다.

모르는 결에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았는지, 배시시 도깨비 웃음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 밤도 긴데 이야기 한 번 들려줘봐."

 

달은 아직도 동쪽 하늘 끝머리에 걸려 있었다.

 

"카구야 공주 이야기라고 들어봤어?"

 

쌉싸래한 죽순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며, 소녀는 운을 뗐다.

 

"알다마다. 벌써 천삼백 년은 더 된 이야기지 아마? 달에서 온 공주님이 지상에서 지내다가, 다시 달나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잖아."

 

"역시 아는구나. 그럼 그 공주님이 수많은 구혼을 물리고 끝끝내 날개옷과 불사의 약만 남기고 돌아갔다는 말도 들었겠네?"

 

소녀는 언뜻 쓴웃음을 지었다. 초탈하지 못한 기억의 소산이었다.

느닷없는 옛이야기에 오니는 의문을 품었으나, 곧이어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래. 사람들은 딱 거기까지만 기억하지. 역사는 취사선택의 연속이잖아? 역사가, 이야기꾼에게 필요 없는 사실은 가차 없이 버려져. 달로 돌아간 공주님 말고, 동화 속 다른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그야…… 아니, 없어"

 

술과 담배에 위로받으며 아마도 목소리를 쥐어짜내는 소녀를 보고, 오니는 말간 창포주를 술잔에 따라주었다.

고맙다고 가볍게 잔을 들어올려 예를 표하는 소녀의 얼굴엔 피로감이 역력했다. 뒤틀린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오니도 충분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술과 연초의 맵싸함이 근심을 잊게 하는 진통제라는 것도 이해했다.

 

"봉래의 옥가지를 구하지 못하고 가짜 옥가지를 만들었다 면박을 당한 쿠라모치 황자가 내 아버님이야."

 

"쿠라모치라…… 성이 후지와라인 이유가 다 있었구나."

 

"응. 선친의 함자는 후히토였고, 나는 귀여움 받던 막내딸이었지."

 

다시 적막이 흘렀다.

오니는 대청에 걸터앉아 화강암 섬돌에 작은 맨발을 올려놓았다. 밤공기를 머금은 돌의 차가움이 여과 없이 전해졌다.

그림자는 어슷하게 서쪽으로 기울었다.

 

"아버님께선 모욕을 받고 크게 낙담하셨어. 그제까진 승승장구하던 귀족이 여염집 여인한테 된서리를 맞았으니 조정에는 무슨 낯으로 나가고, 주위 시선은 어떻겠어? 그 뒤론 바깥내외를 금하고 집에서만 지내시다, 심하게 초췌해져 옛날 모습도 찾아볼 수 없게 되셨지."

 

"딱한 이야기네, 처음 듣는 말인데."

 

"그렇게 3년이 지났는데, 집안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아? 아버님이 폐인이 되신 뒤로부턴 얼굴이 닮은 대역을 세워 조정에 출입시켰고, 오라버니들은 서둘러 정치 수업을 받는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생활이 송두리째 바뀐 거야. 어린 막내였던 나는 어른들 안중에 없었지. 무척이나 외로웠다? 귀족 집이니까 놀아줄 친구도 없지, 나이 가까운 언니오빠들도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느라 바쁘지…… 하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왜 그리 되셨는지는 어렴풋이 눈치 챘는데, 그렇다고 어쩌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걸……"

 

오니는 조용히 응응 맞장구를 쳐주며 술을 따랐다. 궐련은 자신을 불태우며 한껏 정취를 돋우었다.

다 탄 재를 놋재떨이에 툭툭 떨어내고, 소녀는 이번엔 입술을 적셔가며 천천히 술을 음미했다.

술담배는 추억과 감정의 촉매제로도 작용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주님이 달로 돌아간다네. 날개옷이랑 약단지를 남기고 말이야. 웬걸, 임금님께선 공주님이 없으면 다 쓸모없다고 약단지를 버리라고 명했다나봐. 세상에서 가장 높아 달과 가장 가까운 산인 스루가의 산에다가. 이거 잘 됐다, 그 약이라도 가져와서 아버님께 드리면 아버님께서 참 좋아하시겠구나. 우리 집도 제 모습을 되찾겠구나, 해서 무작정 스루가로 걸어갔지."

 

"터무니없는 짓을 했구만, 서울에서 스루가까지 몇 리 길인지도 모르고!"

 

오니는 실없이 픽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야마토에서 스루가까지는 족히 천 리 먼 길을 하릴없이 걸어야만 한다.

소녀는 입을 비쭉대며 바싹 구운 참새구이를 젓가락으로 발라냈다.

 

"진짜로 병사를 뒤쫓아 물어물어 갔어. 부잣집이었으니 노잣돈은 있었단 말이야. 그러다 결국엔 힘에 부쳐 산을 목전에 두고 쓰러졌는데……"

 

"쓰러졌는데?"

 

"츠키노 이와카사라는 장군이 나를 부축하고 정상까지 가주었어. 어린 여자아이에 귀족이니 나중에 서울로 돌아갈 때 데려갈 셈이었겠지. 그나저나 워낙에 산이 높아야지, 만년설까지 남아있더라."

 

"약은 어쩌고?"

 

전래동화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듣던 오니는 퍽 조바심이 났는지 자꾸만 재촉을 했다.

소녀가 요괴라면 허풍선이에 이야기도 순 가짜겠고, 정말 천 년을 산 인간이라면 진실한 이야기리라 짐작은 갔다.

거짓말을 꺼리는 오니 앞에서 허세를 늘어놓는 사람은 쉬이 보기 힘드니 십중팔구 인간이렷다.

소녀도 재촉에 따라 호흡을 짧게 하였다.

 

"이와카사가 약단지를 분화구에 버리려니까 산의 신이 여기에 버리지 말라고 크게 화를 내더라고. 별 수 있나, 그날은 공쳤으니 하룻밤을 묵고 다른 산으로 가야지. 피곤했던지라 금방 잠에 들었는데, 아침이 되니까, 아니 글쎄 병사들이 죄다 죽어있더라. 소름이 쫙 끼쳤지"

 

잔이 비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술잔 속의 물빛 달이 자꾸만 일렁거렸다.

오니도 담화에 푹 빠져 술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잔질에 열중이었다.

 

"산신이 말하길, 약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다 죽었다고 해. 그거 새빨간 거짓말이야. 피부가 새까맣게 오그라든 자국이 온몸에 가득한데 그게 사람이 싸운 흔적인가? 신의 조화지. 몇 번을 게워냈는지 몰라."

 

"지독한 꼴을 봤구나, 신이라는 족속은 그 변덕이 탈이야. 신들 앞에선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나 진배없잖아.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죽이나?"

 

소녀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

어색한 침묵의 본뜻이 묵념인지 추모인지 참회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니는 공연히 술맛 좋다고 맥없는 소리를 내뱉어야 했다.

 

"시체에 거적만 덮어두고 급하게 산을 내려오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식은땀이 흐르더니 저 약을 차지해야 한다는 충동에 휩싸였어. 나는 내 앞을 인도하던 이와카사를 있는 힘껏 걷어찼지. 목뼈가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 그 끔찍한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살인을……"

 

소녀의 목소리가 한층 나직해졌다. 오니는 숨을 죽였다.

 

"부축하려 뒷머리를 받쳤는데, 손바닥엔 시뻘건 핏덩이가 묻어나오고…… 누가 나를 꾀었나 황망한 마음에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과 워낙에 가까운 산인지라 어둑새벽이 눈앞에 펼쳐져있는데, 끔찍하게 시허연 으스름달이 나를 보며 비웃어대는 그 꼴이…… 그 자식이……"

 

불끈 부르쥔 주먹을 치켜들고 공연히 하늘을 내찌르다 분에 못 이겨 빈 잔을 채운다. 그제야 오니는 소녀에게 술이 필요했던 이유를 알았다.

 

"좋다, 네놈의 간계구나, 내 맞서주마, 단지를 열고 단숨에! …… 너 그 약이 무슨 약이었는지 알아? 봉래의 약이야, 봉래의 약. 늙고 싶어도 늙지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인생이 영원이 되는!"

 

 

 

 

"너 취했다, 숙취가 심할 테니 이만 물리고 내일 마저 얘기하자고."

 

오니는 소녀를 걱정해 차가운 술동이를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소녀의 벌겋게 충혈된 눈자위가 번득거렸다.

 

"취해? 내가 지금 취했다고? 하, 기다려봐, 10초면 술이 깰 테니까."

 

갑자기 소녀는 상을 박차고 일어나더니, 신도 신지 않고 비틀거리며 마당 연못으로 향했다. 우뚝 선다.

그러고는, 더듬어 알맞은 돌을 찾아 못을 겨냥해, 광인과 다름없는 거친 얼굴로, 고승의 승무처럼 다만 사뿐히, 팔매질을 한다.

 

통쾌! 물보라가 치솟고 수면이 요란을 떨며, 연못 위에 정좌한 보름달이 산산이 박살났다.

달무리도 산화한 남김없는 못가에서, 춤사위를 마치고 흡족하게 웃으며, 소녀는 스스로 새빨간 불덩이가 되었다.

밤의 불길은 순백으로 타올라 귤색으로 물들고 검붉게 사라졌다.

소신하는 육체에선 고통의 단말마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내 잿더미만 남고 물결은 잔잔해졌다.

 

오니는 자신도 크게 취해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닐까 하여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이윽고 꺼먼 잿더미가 된 소녀의 여백에서 불씨가 일어나더니, 공백을 핏빛으로 태우며 살갗이 재생되었다.

검은 밤이 희붉게 빛났다. 달은 여전히 하늘에서 찬란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했잖아, 나는 결단코 죽지 않고 되살아나. 술기운도 다 날아갔다."

 

경악하는 오니 앞으로 재탄생한 소녀가 숯검정을 툴툴 털어대며 걸어왔다. 온몸에 불그죽죽한 불김이 서려있었다.

 

"달이 그렇게나 원망스러운 거야?"

 

"원망스럽고말고. 아버지를 모욕하고, 인간에게 주어선 안 될 금기를 함부로 남기고, 끝끝내 나까지 희롱해 사람을 죽이게 했는데……"

 

소녀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방석에 앉아 술을 따른다. 얼큰하게 흔들리던 목소리는 이미 원상태로 돌아왔다.

마당을 바라보며 뜨악한 마음에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오니도 떨떠름하게 술을 따랐다.

 

"그 뒤로 사는 게 참 모질어졌어."

 

몇 분이 지났을까, 오니는 골똘한 표정으로 연거푸 자작을 하고 소녀는 궐련 한 대를 심지까지 피웠다.

침묵은 소녀가 나지막이 깼다.

 

"서울로야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지, 한 달 하고 달포 쯤 지났으려나, 대문 앞에 서니 눈물이 막 터지더라. 나를 걱정하시던 부모님께서는 맨발로 뛰어나오시고, 잔치가 며칠이고 연달아 열리고…… 기뻤지, 그땐."

 

오래 살아 지혜로운 오니는 이야기의 행선지를 대강 알아차렸다.

달큰하던 창포주에서 소태 쓴맛이 배어나왔다. 자연히 잔질도 잦아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죽어갔어,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누이들은 모두 혼례를 치렀고…… 나만 여전히 어린 날의 몸뚱이를 지닌 채로"

 

"그래"

 

"동짓달 열엿샛날, 참 춥던 날, 괴이하다는 눈칫밥이 기어이 바깥소문으로 나돌게 되니, 후지와라의 실권자였던 큰오라비가 나를 내쫓더라고"

 

그 지점에 이르러 소녀의 목울대가 뜨거워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 엎디어서 내가 뭘 잘못했냐고 울며 두드렸는데, 다 소용 없더라. 피보다 진한 게 없다지만, 병든 피는 토해내 솎아내는 게 섭리잖아. 그렇게 울다 지쳐 딱딱한 댓돌 위에서, 찬바람과 서릿발에 얼어 죽은 것이…… 내 첫 번째 죽음이었어."

 

소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술잔이 집어삼켰다.

괜스레 크으 하고, 여태껏 내지 않던 감탄사를 내뱉어 감정을 흩뿌리고서는, 다시 넋두리인지 참회록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가 뜨고 되살아났는데,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있더라. 인간이 아니라는 낙인처럼."

 

"고생길이 훤하구나."

 

"이제 거기서 내가 뭘 어쩌겠나, 도망쳐 나와 길 없는 산중을 해메었지, 후지와라의 소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 몇 주나 지났을까, 어느 작은 산촌에 들어섰어.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하던지, 제대로 씻지도 못한 꾀죄죄한 몰골이었는데도 쉬어가라고 먹거리를 내주더라고. 정말 정직한 사람들이었지……"

 

"머리칼을 보고도?"

 

"염색은 어깨너머로 본 게 있어서, 흑토랑 오리나무 껍질로 검게 물들였어, 나도 그땐 사람이 그리워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으니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닐 텐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입을 다문 뒤에야 오니는 자신의 말투가 취조에 가까웠음을 깨닫고 미안함에 자책했다. 그만큼 조바심이 앞섰다.

 

"수양딸로 들어가기엔 나이를 먹었으니, 그간 몰랐던 양민들 삶을 흉내 내서 토막집을 짓고, 밭도 갈고, 일손이 모자라다면 달려가 돕고, 축제 때에는 신명나게 어울리고, 잘 먹고 잘 살았지. …… 사랑도 했고."

 

"사랑이라, 술맛이 바뀌겠는걸."

 

"2년쯤 그렇게 살았을까, 어느 남자가 날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더라고. 내 마음도 그랬으니 혼례를 올렸고. 해산달이 되니 내 옆에 꼭 붙어서 소 여물 주는 것까지 잊어먹던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정한이 섞인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어조가 퍽 담담해진 것을 보니 아까 피어난 불꽃이 자못 심정을 가라앉힌듯했다.

어쩌면 심정이니, 감정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가슴 한편으로 침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스라한 저 너머를 바라보며, 수묵화처럼 소녀는 이야기했다.

 

"딸 하나에 아들 둘, 가만 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지……"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야, 닮지 않은 자는 배척하는 게 인간들의 사회인데, 어디 불사자가 살아갈 자리가 편하겠나."

 

"눈치가 있으니 대충 예상이야 하고 있었지, 가족들은 나를 끝까지 믿어줬지만, 남편이 늙어 죽었는데도 내가 젊은 모습이니, 시선이 곱질 못하잖아. 어느 날, 그 해는 겨울은 지나고 씨뿌리기 전 농한기였는데, 다 큰 아들놈 그림자가 창호지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려. 직감이 오더라고. 뭔 일이냐니까 얼굴이 죽상이 되어가지곤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촌장 할배가 뵈자고 하셔서유’ 하데. 아아, 여기서도 끝났구나……"

 

바알간 담배가 깊게 타들어간다. 가슴속을 시꺼멓게 태운다.

 

"마을 사람들한테 난 죽지도 늙지도 못하는 사람이라 토설하고, 제발 여기 마저 살게 해주시오 싹싹 빌어봤는데, 안 되더라고. 나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집단의 힘이 좀 무섭나. 다신 오지 말라고, 소금을 맞고 또 쫓겨났지."

 

"단장斷腸……"

 

오니는 고사를 읊으며 씁쓸한 술잔을 채웠다.

 

"뒷산 중턱에 움막을 치고, 먼발치에서 새끼들을 바라만 보는데, 진짜 미쳐버리겠더라. 산나물이니 버섯이니 닥치는 대로 캐서, 달이 어두운 밤이면 몰래 집 담장 위에 올려놓고 왔어. 바랜 창호지문을 한참을 보다가, 결국 들어가진 못하고…… 그 다음 밤에 가서 나물이 없어진걸 보면 아아, 잘 받았구나. 내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고 있겠구나 하고……"

 

"한참이나 또 속을 썩이며 살았겠구먼."

 

"얼마 가지도 못 했어. 보름도 못 지나 마을 자경단한테 들켰지. 밤중에 집 앞이 소란스러우니까 큰 애가 뛰쳐나왔는데, 근데 그 청년이 우리 딸을 보고 뭐라는지 알아? 요사스러운 것의 새끼! 내가 이럴 줄 알았다! …… 아, 내가 여기에 있으니 자식들한테도 낙인이 찍히는구나, 얼른 떠나야 우리 가족이 먹고 살겠구나 …… 싶더라. 모질지, 으응. 모질어."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 울음소리가 잠시 흐른 정적을 메운다.

소녀는 담배를 꺼내려다 말고 잠시 밤공기에 몸을 맡겼다. 달빛이 쏟아지는 마당엔 소녀의 잿불이 사위어갔다.

 

 

 

 

"그래서, 가족을 포기하고 떠났구나."

 

오니가 솔직하게 물었다.

 

"가족을 위해서 떠난 거지. 나는 타인과 섣불리 관계를 맺으면 안 될 허인임을 뼈저리게 느끼고서. 혼자서 살면 뭐하나? 죽고 싶더라."

 

까물거리던 잿불도 푸욱 꺼지고, 안주 접시에도 군데군데 빈틈이 생겼다. 죽음을 논하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가족 생각에 한스러워 울다 죽고, 산짐승에 뜯겨 죽고, 굶어 죽고 목말라 죽고 …… 끊임없이 죽는데 역겹게도 태어나더라. 삶에 더 이상 의미가 없어서, 살아가야 할 이유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훨씬 많아서, 열도를 유랑하며 죽을 방법을 모색했지.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바다에 몸을 처넣고, 불길에 몸을 맡기고…… 암만 해도 죽질 못하더라. 이야, 진시황은 저승에서 날 비웃고 있을 거야."

 

"듣기만 해도 섬뜩한걸."

 

"왜 사나, 내가 사람이긴 한가, 죽어 마땅한 게 사람 아닌가…… 온갖 죽음과 부활에서 환멸밖에 남지 않았는데, 하나 내게 깨달음을 준 죽음이 있어. 어느 봄날 숯불같이 시뻘건 불덩이를 토해내던 화산을 보고, 그 뜨거운 용암에 내 몸을 맡겼는데, 손발이 녹아내리고 정신이 아찔한 것이 아! 이게 참된 죽음의 고통이로구나. 그게 나한테는 멸죄와 해탈을 향한 진정한 쾌락처럼 느껴지더라고. …… 빨간 용암 속에서 수백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다가, 용암이 잿빛 화산석이 된 뒤에야 죽음을 멈췄는데, 눈물이 줄줄 나더라. 이번엔 죽을 줄 알았는데, 이래서야 무생물과 다를 게 뭔지. 봉래의 저주를 받은 인형이구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자신의 몸에 주황색 불꽃을 휘감았다. 광배처럼 빛나는 불사조의 불꽃이 넘실거렸다.

 

"그러고 문득 깨달은 게, 이 불의 의미였지. 불은 태울 것이 남아있는 한 꺼지지 않는다. 불을 다루는 피조물은 인간뿐이며 이는 불멸의 진리이다. 내가 인간이고자 하는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한, 불꽃은 영원히 내 몸과 가슴을 태우며 살아 숨쉬겠구나, 살아있는 불씨는 내 삶의 증거고, 태울 것이 남아있는 인간임을 증명하는구나. …… 용암의 씨앗이 가슴에 깃들어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거든."

 

"불의 의미라……"

 

"빠알간 불꽃을 보면, 이와카사의 검붉은 피도 어른거리고, 핏덩이 같던 내 새끼들도 보고 싶고 …… 맥박 치는 심장과 씻을 수 없는 죄와 끝나지 않을 삶과 기약 없는 죽음이 생각나서 …… 그리고 저 달이 떠올라서, 지피어 오르는 불사의 연기가 어쩌면 달에 닿아 공주가 볼까 싶어서, 지금도 마음이 복잡해져."

 

"빨간 것들이랑 연이 징글맞게 깊구나. 불사의 연기라……"

 

"이름도 바꾸었잖아. 매홍妹紅이라 쓰고 모코우. 내게도 가족이 있었음을 기억할 누이 매에, 인간으로서의 삶을 증언할 붉을 홍 자를 써서. 나도 빨갛게 타오르는 생명이라고. 아직도 억척스레 살아간다고. 전에 쓰던 이름은 한참 전에 까먹었어. 1000년이나 지났으니……"

 

"기가 막힌 사연이네, 그럼 천 년을 여기 죽림에서 혼자 산거야?"

 

오니는 소녀의 이야기에 감탄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그럼, 깊은 사이는 내게도 상대에게도 상처만 남기는걸. 대나무숲은 좋은 안식처야. 원체 빽빽하니 들킬 염려도 적지. 50년이면 꽃을 피우고 다 같이 죽어버려서 시간을 세기도 좋지. 천 년을 그냥 유유자적하게, 너처럼 가끔 흘러들어오는 사람이나 도와주며 살아왔어."

 

 

 

 

불꽃이 꺼지고 동이가 바닥을 보였다. 아릿한 술기운과 차분한 공기가 장중히 내깔린다.

한껏 취한 술자리에 으레 찾아오는, 어색하지도 않고 때로는 즐기고 싶지만 누군가 깨야만 하는 적막이었다.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안주로 들은 이야기 중 최고였어, 보답을 해줘야겠네!"

 

유쾌한 오니가 소녀에게 윗몸을 기울이며 과장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다 마신 창포주가 못내 아쉬웠을 지도 모른다.

 

"저 달이 그리도 밉나?"

 

"밉지이."

 

"그래, 그럼 이 술을 마셔봐!"

 

오니는 대뜸 허리춤에 찬 표주박을 꺼내들어 다짜고짜 술을 따랐다.

소녀는 반문하고 싶었으나 이야기에 취한 정신은 잔을 마다하지 못했다.

 

"이게 내 보물 1호, 이부키효야. 인간한텐 너무 독해서 안 주는데, 너한테는 내가 특별히 줘야겠어."

 

"독주라고? 너무 센 술은 못 마시는데."

 

입술까지 술잔을 가져간 소녀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다.

오니는 벌컥벌컥 표주박 째로 술을 들이키더니, 입가에 술방울을 뚝뚝 흘리며 제풀에 신나 권주했다.

 

"마셔! 잔을 계속 기울여서 눈앞이 기분 좋게 돌아가야 선물을 받지, 어차피 삐딱하게 기운 세상인데 조금 더 기운다고 뭔 상관이 있겠어? 그 차오른 술잔이, 잘 차오른 보름달이라 생각하고, 그 달을 기울여, 단숨에 집어삼키는 거야. 잔을 기울어야 달이 기운다, 흠뻑 취해야 너도 나도 기운을 내지! 옳지, 잘 마시네!"

 

소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알 수 없는 술을 마셨다. 과연 독한 술이라 목구멍으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라왔다.

 

"잔을 기울여야 달이 기운다라……"

 

"하하하, 어때, 좀 알딸딸해? 세상이 핑글핑글 돌아?"

 

별난 말장난을 곱씹던 소녀에게 너털웃음을 지으며 오니가 물었다.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술이란 녀석은 참 좋아. 알맞게 취하면 세상이 핑그르르 돌고, 세상 만물이 다 예뻐 보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도원향으로 우리를 초대하잖아?"

 

오니는 벌떡 일어서 맨발을 하고 마당으로 나섰다. 소녀는 느닷없는 행동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안주상에 두 팔을 얹고 몸을 돌려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하늘을 향해 우뚝 선 오니는, 별안간 시야에서 사라져, 이슬 방울방울로 화하더니, 대기 중의 물방울이 상공에서, 무당처럼 미친 춤을 춘다. 신명나게 살풀이춤을 춘다.

아니면 오니는 그저 꼿꼿이 서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소녀에겐 주황 파랑 하양 그리고 빨강으로 물들어 색색이 변해가는 무수한 오니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려왔다.

 

"넌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살아왔고, 분명히 좋은 인간이야. 네 삶의 불꽃은 찬란히 빛나 연연했고, 지은 죄에 비해 불사의 형벌은 너무도 무거워. 그 벌을 내린 저 달을 진정으로 원망한다면, 저깟 달 오늘밤은 내가 기울여주지!"

 

소녀의 눈앞은 어지럽게 돌아가고 오니가 비틀거리는지 세상이 비틀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하늘에는 아직 휘영청 밝은 달이 온 누리를 비추고 소녀의 잿더미는 땅에 뒹굴었다.

도취한 황홀경이거나 망령된 환각이거나 어쩌면 사실이었을 착란을 외마디 함성이 찢어발긴다.

 

"쇄월碎月이다─!!!“

 

그 순간, 어느새 한 몸이 된 오니가 달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다.

 

쇄월! 쩌——억, 굉음을 내며, 하늘의 둥근 달이, 산산이 부서졌다.

경천! 찬연한 달빛 조각조각이 땅으로 나린다. 세상을 희붐하게 밝힌다.

감탄! 삼라만상이 진주색 달빛에 물들어 맑은 윤기를 자랑하고 나선다.

아아! 소녀의 불씨가 하얗게, 꺼멓게, 새빨갛게 되살아난다.

 

 

 

소녀는 홀린 듯이 마당으로 나가, 오니와 춤을 추었다.

달이 하늘에 떠있건 떠있지 않건 중요하지 않았다. 취한 밤은 아직 길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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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판 공유 링크

https://drive.google.com/file/d/15GtlBkdEEOOhEl8e2RWaxcqg5LZH33hL/view?usp=sharing

 

봉래제, 무지개 일곱빛깔을 주제로 한 소설 합동지 '칠색채홍전'에 빨간색으로 출품했던 작품입니다..

시간이 꽤 지나고 추가 합동지 통판도 없어 웹공개합니다.

 

삽화는 합동지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참가하신 쿠야(https://twitter.com/hey36253625)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재차 감사드립니다!

 

 

빨간색-모코우를 토대로 주황색에 해당하는 캐릭터였던 스이카도 등장시키며 이야기를 썼어야했는데, 색다른 방식이라 굉장히 재미있었네요. 

'달까지 닿아라 불사의 연기'와 '쇄월'에서 착안해, 달과 관련된 모코우의 이야기를 담담히 써보았습니다.

읽으시고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영야초 모코우의 모든 스펠카드명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는 이스터에그(?)도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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