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니시니혼 후쿠치야마역 마이즈루선 히가시마이즈루행 열차
히가시마이즈루역 구내

마이즈루는 교토 북쪽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근대 이전까진 작은 어항이었지만 지리적 이점이 재평가되어 진수부가 설치되고, 현재도 해상자위대 기지가 남아있는 곳.

한국으로 따지면 진해와 비슷한 위치일까.

 

길가 지장당

역에서 항구로 향하는 1km 남짓한 길에는 눈이 녹지않고 남아있었다. 북쪽이긴 한가보다.

 

원래 군항 접속노선(통칭 나카마이즈루선 中舞鶴線)이 깔려있었다는 가도.

2차대전 패전 이후 이용객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1972년 수요부족을 이유로 폐선되었다고 한다.

 

승강장 터가 남아있다.
일본유산 / 진수부 키타스이 수도(터널)

관광안내 책자에도 실려있지 않고, 심지어 구글맵에도 등록되어있지 않은 터널이었지만

나름 정취있는 장소였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보이는 마이즈루 붉은 벽돌 창고군

 

붉은 벽돌 창고 3호동 / 중요문화재 구 마이즈루 해군 병창 탄환고 겸 소총고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시청이다.

1900년대 지어진 이 벽돌 창고들은 마이즈루 진수부의 부속 건물로 활용되었다.

종전 후 마이즈루 시청사로 쓰이다, 지금은 관광용으로 개방되어 있다.

 

마이즈루의 위치
마이즈루 지혜 창고의 고양이
전함 미카사
아무래도 해군 본부인지라 칸코레 팬들에겐 성지로 여겨진다 들었다. 나는 밀덕도 제독도 아니라 잘 모르지만..
도고 헤이하치로의 글
내부 상점, 다양한 기념품과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다양한 특전이 딸려있는 카마보코 테가타
웬 열차를 전시하고 있는 창고도 있었다. 인입선용으로 쓰이던 차량일까..?

 

마이즈루 여행 블로그를 보면 꼭 나와있는 구도
창고 앞에는 바로 어항이 있는데, 맞은편엔 해군 군함이 떠있어 이색적이다.
진해항을 직접 가본적이 없는데, 이렇게 좁은 만에 군함과 민간 어선이 함께 떠있는건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인가..?
세계 벽돌 박물관
공짜로 관람 가능해서 둘러보고 나왔다.
마이즈루 역앞 스트리트
마이즈루 히키아게 기념관

 

사실 마이즈루에 온 주된 목적은 '히키아게 기념관'이었다.

군항에 목적을 두고 오는 사람이 많던데, 나는 밀리터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라..

 

시베리아 억류자 수용소 분포도. 저 멀리 흑해 연안까지 수용소가 있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사할린 등지에서 관동군과 교전한다. 

당나라 군대였던 관동군은 제대로된 전투도 벌이지 못한 채 민간인을 버리고 도망치고, 그 결과 57만 5천명에 달하는 일본인(무장해제된 관동군 포함)이 소련에 포로로 붙잡힌다.

 

약 58만 명의 포로는 시베리아의 수용소(굴라크)로 보내져 노역을 하게 되는데, 이를 일본에선 시베리아 억류(シベリア抑留)라 부른다.

전후 소련의 복구작업에 투입된 일본인 포로들은 최장 10년간 강제노동을 하게 되었고, 그 중 6만여명은 현지에서 사망한다. 현재도 구소련 곳곳에는 일본인 포로 묘지가 조성되어 일본인 여행객이 자주 찾아간다고 한다.

 

시베리아 억류는 소위 북방영토 문제와 함께 러일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시베리아 수용소를 재현한 공간

2차대전 종전 후 한반도나 중국에 있던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귀국(引揚, 히키아게)한다.

당시 마이즈루항도 히키아게용 항구로 지정되었는데, 다른 항구들은 금방 히키아게 항구에서 해제된 반면 마이즈루항은 소련과 국교회복이 이루어져 포로들이 귀환하는 1956년까지 그 역할을 다했다.

 

기념관 내부에는 포로생활을 증언하는 다양한 사료가 전시되어있다.

시베리아 억류를 생생히 보여주는 해당 사료들은 '마이즈루로의 생환 - 1945~1956 시베리아 억류 일본인의 본국으로의 히키아게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래는 특별전시 중이던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록화들. 번역문을 덧붙여놓는다.

 

북한 소련군정 포로 수용소가 그려져있어 이색적이었던 한 기록화

① 북한 삼합리 수용소에서 차디찬 겨울을 넘겼다.

② 영양이 충분하지 않은 식사를 하다보니 야맹증 환자가 속출했다.

③ 남포 수용소로 옮겨져 귀국하게 되는줄 알았다.

④ 6첩방에 24명, 그래도 어떻게든 누워지긴 했다.

시베리아로 이동된 후

① 일본병 "오, 아가씨 사랑합니다!" / 아가씨 "앗, 위험해.. 안 돼요"

② 위험한 작업이었지만 야마토 정신이 도움이 되었다.
5개년 계획인지 뭔지 때문에 남녀노소 망치를 들고 노력했다.
소련병 "빨리 해라!" 한밤중의 석탄 하역 작업은 힘들었다.

  

① 노르마, 노르마의 돌 캐기 작업. 쓰러진 사람도 많았다. 

※ 노르마(norma) : 소련 노동자의 1일 책임 생산량
한나절간 같이 일한 러시아의 아가씨들. "나중에 또 봐요"
우크라이나의 흙은 양질이어서 감자가 크고 맛있었다.
어느 지구에 가도 똑같이 춥고 어두운 수용소였다.

① 이런 한때를 보내다보면 포로 신분인 나 자신을 잊기도 했다. (국경을 넘은 노동요가 있었다.)
"우와-! 이제 곧 귀국이다!" 이런 오보는 늘상 있었다.
독일 병사 "저한테도 밥을 주세요" 소련 관리 "장난하냐? 게르만인이..."
사랑을 나눈 뒤 슬픈 이별을 맞이한 포로도 있었다 한다.   

귀국(히키아게)이 결정된 뒤의 모습들

① 귀국 도중 나홋카에서 일본공산당원이 '못 돌아가게 할거다'고 소리치고기도
잔교를 건너는 병사의 눈에 비친 일본의 푸르름이 아름다웠다.
내일은 드디어 일본으로 귀국,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DDT를 온몸에 뒤집어쓰게 한다. 오늘부턴 백인?

지금은 철거된 히키아게항이 있던 자리. 기념관 뒤 언덕에서 보인다.

내부에서 전시물을 보다보니 자원봉사를 하시는 할아버지께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멀리 오사카에서 기념관을 보러 왔다니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셨는데, 다름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아버지께서 시베리아에 8년간 억류되었던 분이었다고 한다. 

 

내가 간 날은 1월 9일로 꽤 추운 날이었는데, 날씨 이야기를 꺼내시더니 아버지께선 '시베리아에선 이런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어!'라고 자주 호통치셨다고 농담을 하셨다.

 

그러면서 억류기간중 4개의 고통이 있었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는데, 추위, 강제노동, 공산주의 교육, 배고픔이었다고 한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버티기 힘들었던건 배고픔이었다니, 시베리아 굴라크의 고됨이 느껴졌다.

 

이렇게 기념관에 와야만, 현지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정보와 체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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