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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8

 

필자는 syudou라는 이름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있다. 악곡 제공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주된 활동은 보컬로이드를 이용한 악곡 제작, 소위 보카로P(물론 아싸에, 이견 없는 오타쿠)이다. 올해 초순에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으므로, 말 그대로 하츠네 미쿠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크립톤 본사가 있는 홋카이도에 하루 3번씩 절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하츠네 미쿠가 인생을(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뒤바꿔버린 사람으로서, 200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의 보카로 악곡들 중 10곡을 골라보았다. 최근 보카로라는 장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 추천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역시 뒤틀어진 오타쿠답게, 이미 다른 누군가가 모아놓은 알기 쉬운 유명곡(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을 고르진 않겠다. 그렇다고 해서 알량한 지식을 과시하듯 마니악한 마이너 곡을 선곡하는 것도 좋지 않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유명하긴 하지만 처음 보카로를 듣기 시작한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악곡들을 골랐다. 이 곡들을 체크해둔다고 보카로의 역사를 완전히 통달하게 된다고 까지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필자와 연령이 비슷한 보카로 리스너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필자가 보카로에 빠져 미친듯이 노래를 찾아다니던 2010년 전후에 악곡이 집중되어 있는 것과, 하츠네 미쿠 악곡만 선곡한 것은 부디 양해 바란다.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썼지만 솔직히 한밤중에 옛날 보카로곡을 듣다가 감성이 터져서 진정시키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자택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요즈음, 시간 때우기 용으로 가볍게 읽어보면 어떨까. 악곡은 발표시기순으로 정리했다.

 

1. *헬로, 플래닛. - 사사쿠레(sasakure.UK) / 2009.5

 

 


칩튠 특유의 소리가 귀엽다. 정직하고 보편적인 멜로디로 지금 들어도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작품에 어울리는 패미컴 게임 같은 mv는 후반부에서 시청자를 울린다. 중학교 시절, 취주학부 부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누나한테 빌린 아이팟으로 이 노래를 듣곤 했다. 지금은 귀에 익은 칩튠이지만, 이 시절에 이렇게까지 팝한 악곡을 완성시킨 사례는 얼마 없었다. 그런 의미로도 '앞서간' 작품이다.

 

이 때까지의 악곡은 '하츠네 미쿠'라는 캐릭터와 악곡의 친화성이 높은 작품이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supercell, kz 작품 등도 하츠네 미쿠를 전면에 내세운 악곡이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봉에 섰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귀엽다, 그거면 된 거다.

 

2. 1925 - 토미(T-POCKET) / 2009.10

 


통기타를 치며 불러야 할 것 같은 씁쓸한 멜로디 라인과, 시적인 가사가 매력적인 노래. 돌이켜보면 이 무렵부터 '하츠네 미쿠'라는 캐릭터에서 악곡이 분리되어 아티스틱한 노래가 늘어났다.

 

또한 이 무렵부터 도왕고가 주최한 니코니코 대회의(초회의)라는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그 이벤트에서 고무(현 Honey works 소속)&[MINT]라는 밴드가 본 악곡을 연주했다. 보카로 악곡의 라이브, 현재 오타쿠 컬쳐의 시작점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지금도 youtube로 해당 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관객, 복장, 모든 것이 오타쿠 냄새로 가득했다. 그게 참 좋았다.

 

3. clock lock works - 하치 / 2009.11

 

설명이 필요없을 요네즈 켄시의 하치 시대의 악곡. 당시 필자는 '쥐었다가 펼쳐서~'로 이미 하치를 알고 있었지만, 본 악곡으로 하치의 늪에 빠져버렸다. 귀여운 타악기, 귀여운 멜로디, 귀여운 하츠네 미쿠의 노랫소리로 이루어진 귀여움의 제트 스트림 어택. '상냥한 노크 소리로 울어 버려'라는 마지막 가사, 어떻게 이리 아름다운 가사를 떠올렸을까. 베이스를 연주하는 애니메이션도 아름답다.

 

이 곡으로 하치 및 요네즈 켄시와 만난 일이 필자의 인생을 결정지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뒤 몇 년에 걸친 기나긴 역사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아닐 수도 있다). 또한, 필자가 생각하는 하치 및 요네즈 켄시에 대한 이야기는 길어지므로 생략하겠다.

 

4. 에? 아아, 그래 - 쵸쵸P / 2010.3

 

야하다. 멜로디가 알맞게 저렴해보이는 부분까지 맘에 든다. 결국 보카로의 목소리에는 저렴한(cheap한) 음원이 어울린다는 필자의 생각을 지탱하는 노래이다. 그리고 그 통설은, 전자 기타와 신디사이저를 통해 일부러 Cheap한 소리를 만들어내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낸 나유타 성인씨나 Orangestar씨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절대로 나쁜 뜻이 아니다.

 

또한, 이 무렵에는 섹시 보이스를 지닌 우타이테도 많아서 그 사람들이 불렀던 해당 악곡의 '불러보았다'도 시대를 느끼게 해줄 좋은 요소로 남아있다. 2절의 '삐-'하고 소거된 부분, 좋다, 움찔움찔 하게 된다. 이 무렵 인터넷 문화에 빠져들어, 지금도 대학을 막 졸업해 입사한 뒤 받는 월급을 우타이테 그룹에 사용하고 있는 지고지순한 부녀자 독자들도 많지 않을까. 세상의 야유에 지지 않고 굳건히 살아가길 빈다.

 

5. 겁쟁이 몽블랑 - DECO*27 / 2010.4

 

'모자이크 롤' '소녀 해부' '고스트 룰 '등, 히트곡 작곡에 정평이 나 있는 DECO*27씨. 그의 초기 명곡이 바로 이 노래이다. 달콤한 과자를 모티브로 해 소녀의 심정과 매치시킨 곡조가 절묘해 당시 DECO*27의 작풍을 대표한다. 이러한 작풍이 유우키 아오이, 시바사키 코우와 같은 아티스트로 퍼져나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순간들을 필자는 고향집의 낡은 컴퓨터로 줄곧 지켜봐왔다.

 

DECO*27씨는 위대하다. 수많은 보카로P가 다른 장르로 흘러나가 활동을 넓히고 있는 와중에, 이 장르를 오래도록 지키며 확산시키고 있다. 다른 장르로 재능을 유출시키는 행위는 나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칭찬해야할 일이지만, 결단코 흔들리지 않는 그의 자세에는 평범하지 않은 늠름함과 존귀함이 있다. 또한, 이전에 필자는 본인의 리스너에게 'DECO*27씨의 대표곡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답변은 모자이크 롤(2010)에서 소녀해부(2019)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쳐 있어 매인상적이었다. 그의 작품이 오래도록 호평받고, 지금도 그 색깔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6. 벚꽃의 전야 - 나노우 / 2010.4

 

 

'청춘이 지닌 푸르름이 있기에 생겨나는 간질간질함'. 그것을 잘라내 표현하는 것이 음악의 역할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본 악곡은 동시대 악곡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청년기에서 어른의 계단을 올라가는 소녀의 심정을 제대로 포착한 가사, 오르골 곡조의 인트로에서 질주감 넘치는 파트로 이동하는 전개, 그리고 후렴구에서 폭발하는 밴드 사운드, 압권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구태여 귀엽고 지켜주고 싶은 미쿠의 목소리를 사용한 것도 오타쿠적으로 훌륭하다.


작곡자 나노우씨는 'CIVILIAN'이라는 밴드의 기타 보컬을 담당하고 있으며, 해당 악곡을 비롯해 나노우씨의 대표곡 '헬로 / 하와유' '문학소년의 우울' 등도 커버하고 있다. 반드시 들어보길 권한다. 해당 밴드는 너무도 좋은 곡을 만들어내고 있어, 다른 기회가 있다면 기사로 써보고 싶을 정도이다. 좋은 밴드를 꾸리는 사람은 예전부터 좋은 곡을 썼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7. 플래시백 사운드 - 쿠와가타P / 2010.5

 

 

 

'퍼즐' '너의 체온' 등의 대표곡을 지닌 쿠와가타P, 대담한 기타 록 사운드를 보카로 신에 가지고온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있었던 '하츠네 미쿠의 목소리는 밴드 사운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볍게 갱신해버린 존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해당 악곡은 그의 강점이었던 기타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곡이다.

 

필자는 보카로를 듣기 전부터 ASIAN KUNG-FU GENERATION이나 Bump of Chicken과 같은 밴드를 자주 듣곤 했다. 그 때문에 밴드 사운드는 귀에 익어 있었고, 소프트웨어로 만들어낸 기타 소리에도 다소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이 악곡을 당시 필자의 얕은 생각을 산뜻한 기타 사운드로 바꿔주었다. 막 외웠던 참이었던 코드로 떠듬떠듬 따라 쳐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담이지만 쿠와가타씨의 트위터를 보았더니, 취직해 고생하고 계셨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당신이 만든 악곡은 리스너들의 귀에 분명히 남아 있고, 지금도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다. 필자도 그런 리스너에 속해있으니.

 

8. 토리노코시티 - 40mP / 2010.7

 

 

 

전술한 '벚꽃의 전야'에 '청춘이 지닌 푸르름이 있기에 생겨나는 간질간질함'을 보여주는 것이 음악의 역할이라고 썼다. 본 악곡도 그 점을 최대한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기 어렵다는 청소년 특유의 소외감을 치밀히 써내려간 가사, 세련되고 깔끔한 어레인지와 거기에 어우러지는 미쿠의 목소리. 심플하면서도 불필요한 움직임이 전혀 없는 영상도 악곡의 매력을 한 층 더 올려준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이 노래가 발표되었던 당시 필자는 중학교 3학년으로 부장을 도맡고 있던 취주학부를 은퇴할 시기였다. 은퇴를 축하하기 위한 송별회에서, 갑자기 예정에 없었던 스피치를 요구받았다. 그 때 필자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당시 미친듯이 듣고 있었던 본 악곡의 가사를 인용해 '취주악은 혼자서 할 수 없으며, 두 명이서도 할 수 없는~' 이라고 얼버무렸었는데, 여자 부원 전원의 눈물샘을 터트리고 박수 갈채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 작곡자 본인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직접 감사를 표하고 싶다.

 

9. 십자탑의 언덕 - 토마 / 2010.12

 

'오렌지' '양키 걸 양키 보이' '엔비 캣워크' 등의 히트곡을 지닌,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토마씨. 하치, wowaka가 쌓아올린 보카로 악곡의 포맷을 좀 더 깎아내어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내 수많은 팬을 양성했다. 필자도 그 팬 중 한 사람이었다. 어지러운 곡 전개와 기타의 고속 커팅, 오컬트스러운 단어로 가득한 가사, 가슴을 뛰게 한다. 토마씨는 역시 대단하다.

 

그런 그의 마이너한 곡을 선곡해보았다. 하치의 초기 악곡을 방불케 하는, 전래 동화와 같은 세계관을 지닌 본 악곡. 매력적이다. 전술한 하치, wowaka에 비해 회자되는 회수는 적지만, 토마씨도 보카로 음악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보카로스러움'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아닐까. 최근의 음악계나 애니송에서도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뭐 단적으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냐면, 다른 유명 P만큼 회자되진 않지만 엄청난 곡들을 작곡한 사람이니, 새로 보카로를 듣기 시작한 분들은 반드시 토마씨를 알아줬으면 한다는 이야기다. 보카로의 '기초'가 여기에 있었다.

 

10. 아스트로너츠 - 시이나 모타(포와포와P) / 2011.6

 

보카로 문화권에선 보기 드문 로우 템포 악곡, 하지만 마지막까지 듣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구성도 멜로디도 비교적 심플하지만, 그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만약 내가 괴롭힘을 당해도 되갚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가사, 엄청나다. 이런 그저 '좋은' 곡이 최근 보카로 신에서는 호평받기 힘든 경향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세월을 거듭하며 기교 넘치는 악곡이 넘쳐나게 되고, 방대한 음악들 속에서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남는 곡이 고평가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곡에는 이런 곡만이 지닌 '좋음'이 있다. 다소 긴 노래지만 부디 한 번 들어보길 권한다.

 

본 악곡의 작곡가 시이나 모타씨는 2015년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수많은 저명인이 추도의 의사를 표했는데, 그 중에는 요네즈 켄시(2015년 블로그를 참조)도 있었다. 또한 필자도 시이나씨와 거의 비슷한 연령이므로 이런 글귀로 감히 다하기 힘든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남는다. 부디 새로 보카로를 듣기 시작한 분들도 시이나씨의 노래를 들어주길 바란다. 보편적인 '좋음'이 그에게 있었다.

 

 

 

이상이다. 길게 썼지만 결국 필자의 추억 이야기를 늘어놓은 졸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열거한 10곡이 모두 명곡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시간이 흘러도 누군가 들어주는 명곡들, 필자가 쓴 노래도 언젠가 그러한 곡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선배들이 쌓아올린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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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들을 위한 syudou의 보카로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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