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봄에 갔다왔는데 하드에 묵혀두다가 이제야 올려보는 호류지 성지순례기

JR 야마토지선 호류지역에서 하차한다. 전통 양식을 본따 만든 역사가 인상적이다.

 

 

호류지역에 도착하자마자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아스트랄한 나라현의 유루캐릭터, 센토군

승려 캐릭터에 사슴뿔을 달아놓은건 대체 무슨 센스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 왼쪽에는 호류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자체 이카루가정(斑鳩町)의 캐릭터도 있다. Welcome to IKARUGA

 

 

슈딩게임 팬들에게는 게임 이카루가로 익숙할 지명

 

토요사토미미노 미코의 모티브,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의 족적이 남아있는 곳을 으레 이카루가(斑鳩)라고 일컫는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이카루가’라는 지명은 세계 최고의 목조건축물이 남아있으며 쇼토쿠 태자가 창건했다고 일컫어지는 나라현 호류지(法隆寺) 일대이다.

 

 

사회파 추리소설 붐을 일으킨 마츠모토 세이쵸(松本清張)는 1971년 주간 아사히에 기고한 글에서 이카루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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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記紀)에 의하면 코겐(孝元) 천황은 ‘카루(輕)의 사카이하라궁(境原宮)’에 있었다고 한다.

‘카루’라는 곳은 타케치군으로 지금은 카시하라시에 속한 곳이다.

이 카루라는 지명으로부터 카루노미코(軽皇子)와 카루노타이시(軽太子), 카루노오오이라츠메미코(軽大郎皇女)라는 이름이 나온다.

카루는 ‘카라(韓)’다. 이 부근의 야요이 유적으로 유명한 ‘카라코(唐古)’ 유적도 본래 ‘唐 당나라 당’이 아니고 ‘韓(= 가야)’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생각된다.

호류지 일대를 이카루가(斑鳩)라고 부르는데, ‘카루(カル)’에 접두어 ‘이(イ)’가 붙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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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겐 천황은 쇼토쿠 태자의 먼 부계 친척이다.

 

도래인은 본고장인 한반도의 지명을 새로운 고향인 일본땅에도 붙이곤 했는데,

이카루가의 어원으로 '가야'가 꼽히는구나 정도로만 알아두자.

 

 

 

 

그 어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카루가'라는 단어는 쇼토쿠 태자의 발자국이 남은 곳마다 새겨졌고

신령묘 미코의 4번 스펠 비보 「이카루가사의 천구의」 또한 그 일례 중 하나이다.

 

 

 

스펠카드의 모티브는 효고현 타이시정의 '이카루가데라'라는 절에서 소유중인 쇼토쿠 태자의 지구본인데,

일본과 유라시아, 아프리카, 남극, 가공의 대륙이 새겨진 오파츠라 여겨져왔다.

 

쇼토쿠 태자가 사용한 유물을 기록한 목록 『상집물장 常什物帳』에 '지중석 地中石'이라 쓰인 돌이 이 지구본이라고 생각되어 왔는데

2003년 과학적 분석 결과 석회로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1602년 명나라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 곤여만국지도의 지형과 매우 흡사해 17세기에 만들어진 모조품이라고 판명되었다고 한다.

 

 

 

이카루가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호류지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호류지를 창건한 쇼토쿠 태자는 고대 일본의 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인물로 여겨진다.

 

 

쇼토쿠 태자는 17조의 헌법과 12계의 관위를 제정해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할 기반을 마련하고

견수사를 파견해 대륙의 문화와 정치를 받아들였으며, 무엇보다 불교를 크게 장려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 개혁 군주이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삼국시대 역사 배울때

불교 수용 : 소수림왕 침류왕 법흥왕 / 율령 발표 : 소수림왕 고이왕 법흥왕... 하고 외웠을텐데

그런걸 일본에서 전부 다 한 사람이 쇼토쿠 태자라 생각하면 얼추 비슷하다.

 

 

 

서기 538년, 백제의 성왕이 불상과 불경을 야마토 조정에 전해줘 일본에도 드디어 불교가 전래되었다.

587년, 천황이 불교에 귀의하자, 유력호족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대립이 심화된다

모노노베는 불교를 배척하는 배불파, 소가는 불교를 수용하자는 숭불파의 선봉에 서서 서로를 공격했고,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 (정미의 난 丁未の乱)

 

 

 

 

 

소가씨 일족에서 태어난 쇼토쿠 태자는 소가씨의 편에 서서 싸웠고, 결국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전사하며 모노노베씨는 멸망한다

정미의 난에서 승리한 소가씨는 권력을 잡아 휘둘렀고, 일본 최초의 여성 군주인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을 옹립한 뒤 쇼토쿠 태자가 섭정하게 한다

 

이게 신령묘의 배경이니 대략적인 배경지식으로 알아두자.

 

 

호류지 남대문

아무튼 그렇게 불교가 일본사에 등장하게 되고

숭불파였던 소가씨와 쇼토쿠 태자는 일본 곳곳에 사찰을 세우게 된다.

그때 세워진 절 중 하나가 바로 이 호류지다.

세계유산 호류지

 

607년 창건되고, 670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곧바로 재건되어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호류지

13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호류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로, 일찍이 세계유산에 지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남대문에서 금당 방향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호류지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고 있는 어느 가족

 

경내에 들어서면 우선 그 크기에 압도되게 된다.

일본의 사찰은 전국시대와 폐불훼석령을 거치며 그 규모가 많이 줄어들곤 했는데,

역시 호류지는 그 명성답게 먼 옛날의 신역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백제의 영향을 받았지만, 일본에서의 개량이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내

높다란 중문까지 이르는 길 좌우로 늘어선 당우들이 중후함을 더한다.

 

호류지의 금당과 오층탑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중문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건축물이다.

 

1300년도 더 전에 지어진 목조건축물들이 즐비한 호류지

호류지의 수많은 가람들은 거의 다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그야말로 '둘도 없는' 세계 최고의 건축물이기 때문.

 

중문을 서쪽으로 돌아 회랑을 따라 진입하면 당도하게 되는 금당과 오층탑 구역

 

32.55m의 오층탑은 호류지를 대표하는 얼굴로 여겨지고 있다.

 

미륵사지나 석굴암에 들어서 석탑과 본존불을 바라보면,

천여년 전에도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나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으리라는 감상에 잠기는데,

이곳 호류지에서도 누군가가 나와 같이 고개를 꺾어 상륜부를 응시하며 부처님께 소원을 빌었으리라 생각하면, 비슷한 부류의 감동이 사무친다.

 

 

태자가 남긴 유산의 대명사이기 때문일까

호류지 오층탑은 미코의 스펠카드 시전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동방의 배경으로 직접 등장하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

정말 콕 집어 '이곳은 성지가 맞습니다' 라는 인증 마크를 받았다.

 

하늘이 맑아 보이지만 계속 여우비가 내려 관람객이 뜸했다.

대강당 처마에서 비를 피하며 한 컷

 

오층탑 좌편으로 지어져있는게 바로 금당이다.

 

 

 

호류지 금당 벽화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렸다는 낭설이 아직도 돌아다니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다.

고대 삼국과 일본의 교류를 실증적으로 복원하지 못하고, 실물에 집착해 대중에 홍보하기 바빴던 안타까운 과거 학계의 산물...

 

 

막상 호류지의 대보장원(보물전시관)에서는 '백제 관음상'을 대표 유물로 내세우며 관람객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백제 관음이라 쓰고 쿠다라칸논이라 읽는다.

 

백제 관음

 

유구한 역사를 지닌 호류지에는 오래된 불상도 많이 안치되어 있어 다수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유물이 바로 '백제 관음'

 

7세기 일본 국내에서 제작된 해당 목조 관음상은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인데

매우 장신이고 이국적인 용모를 하고 있어 백제의 불상을 참고로 해 만들어졌다는 전승이 있었고, 그 때문에 '백제 관음상'이라 불리게 되었다.

 

 

불상과 관련하여, 백제 양식이 반영된 유명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백제의 성왕이 일본에 불경과 함께 전래했던 불상은 소가노 이나메의 집에 안치되어 있다가 병화에 휩쓸려 연못에 빠졌는데

후에 혼다 요시미츠라는 스님이 건져내어 나가노의 젠코지로 가져가 봉안했고, '젠코지식 약사여래불'이라는 양식으로 지금도 애용되고 있다.

 

 

몽위 관음

각설하고, 호류지 소장 유명 불상으로 또 '몽위관음 夢違観音'이 꼽힌다.

몽위관음이라 쓰고 유메타가이칸논이라 읽는다.

 

온화한 미소, 사실적인 신체 표현, 굽어진 손끝까지 유려한 아스카 시대의 걸작이다.

 

이 관음상에 절을 올리면 나쁜 꿈을 좋은 꿈으로 바꿔준다는 신앙이 있어 '몽위관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몽위관음은 비봉클럽의 두번째 앨범인 '몽위과학세기 夢違科学世紀'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상한 꿈을 소재로 환상적인 세계를 오가는 해당 앨범의 컨셉에 잘 어울리는 원소재가 아닐까.

 

보물전을 찬찬히 관람하고 호류지 서원 권역을 나와 동원가람 쪽으로 향한다.

소장 유물의 라인업이 국립박물관에 비견할만큼 대단하다보니, 보물전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입장료 아까워하지말고 꼭 들어가보자.

 

사리전 수리가 한창이었던 동원가람 일대, 그래도 몽전은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꿈꾸는 전각이라는 뜻을 지닌 '몽전 夢殿'은

'쇼토쿠 태자가 법화경을 읽으며 명상 중에 꿈속에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나타났다'는 전승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신령묘 5면 필드곡인 '몽전대사묘 夢殿大祀廟', 그리고 게임 배경으로 등장하는 대사묘의 외관은 이 몽전을 모티브로 삼았다.

쉬이 볼 수 없는 팔각원당 형식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

실제 몽전은 1층짜리 건물이지만, 게임 속의 몽전대사묘는 수층에 걸친 팔각 양식으로 묘사된다.

 

 

'구세관음 救世観音'은 몽전의 본존불로, 호류지 전래의 기록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와 같은 크기로 지어진 등신불이라고 한다.

1884년 미국인 동양미술사가 '페놀로사 Fenollosa'가 흰 천에 싸여있던 봉인을 풀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쇼토쿠 태자의 불교에 대한 신앙을, 본인의 모습을 본딴 불상으로 실체화한 해당 유물은 지금도 평상시엔 관람할 수 없는 '비불 秘仏'이다.

 

신령묘 미코의 5번 스펠인 광부 천수관음의 빛나는 후광, 광부 「구세 플래쉬」는 몽전의 구세관음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쇼토쿠 태자의 숨결이 서려있던 호류지를 뒤로 하고 다음 성지로 향한다.

주변에 사적들이 제법 많으니 시간이 많다면 천천히 둘러봐도 좋을듯.

 

동아시아 세계에 이 도래한 것은 대략 BC 1000년경으로,

중국과 한반도에선 은조와 고조선 대에 이미 말이 사육되고 있었으나 일본에 말이 전래된 것은 고분시대에 해당하는 4세기 경이었다.

 

본디 대륙과 가깝고 권력을 지니고 있던 큐슈를 위시로 한 서일본 일대에서 많이 사육되었으나

카이(甲斐, 지금의 야마나시)는 예로부터 질 좋은 준마들을 기르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4세기 후반의 고분군에서 말 이빨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카이의 말은 일본 츄부지방에 해당하는 야마나시와 야마토 정권이 예로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표가 되기도 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카이의 말은 일본에서 명마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고, 고대 전설에도 종종 등장하는 존재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그려진, 쿠로코마를 타고 후지산을 넘어가는 쇼토쿠 태자의 그림 (일본 국보, 쇼토쿠 태자 회전 聖徳太子絵伝)

 

개중에는 카이의 말과 관련해 쇼토쿠 태자와 얽힌 설화 또한 남아있는데,

 

일본의 사서 『부상략기 扶桑略記』에 따르면,

598년 쇼토쿠 태자와 대신 소가노 우마코는 지방에 명령하여 명마를 헌상하도록 하였다.

아스카 궁전의 마굿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말들이 몇 백 마리 있었는데

수많은 말들 중 쇼토쿠 태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카이에서 올라온 검은 말(黒駒, 일본어 발음은 쿠로코마)이었다.

 

그 검은 말은 다리는 희고 털이 짙푸르렀는데, 쇼토쿠 태자는 그 말이 신마(神馬)임을 바로 알고 시종에게 사육을 명하였다.

동년 9월, 쇼토쿠 태자가 말에 직접 시승하니 말은 하늘 높이 뛰어올라 하늘을 날며

태자와 시종을 데리고 간토 지방으로 날아가 후지산을 넘어 나가노에 다다른 뒤, 3일을 거쳐 다시 아스카로 돌아왔다고 한다.

 

 

쿠로코마 동상, 타치바나데라

 

이 명마에 얽힌 이야기는 말의 죽음과 얽힌 기록으로 사서에 재등장하는데,

 

『성덕태자전 보궐기 聖徳太子伝補闕記』에 따르면

쿠로코마의 죽음을 슬퍼한 쇼토쿠 태자가 말을 위해 만든 분묘가 중궁사(中宮寺)의 남측에 있는 커다란 묘라고 전해진다.

 

『쇼토쿠 태자 전력 聖徳太子伝暦』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죽은 뒤, 슬피 울며 태자를 따라 죽은 쿠로코마를 군신들이 갸륵히 여겨 중궁사 남쪽에 묻어줬다고 전해진다.

 

 

코마즈카 고분

실제로 나라현의 중궁사 부근에는 '말 무덤'이라는 뜻인 코마즈카 고분(駒塚古墳)이라는 고분이 남아있어 전설을 전해주고 있다.

호류지에서도 가까워 도보로 약 15분가량이 소요된다.

 

 

 

 

신령묘에서 태자가 등장하고 8년이 지나, 귀형수에서 태자의 애마였던 쿠로코마 사키가 실장되며 쿠로코마도 환상향의 일원이 되었다.

 

 

사키의 테마곡은 '쇼토쿠 태자의 페가수스'

하늘을 날아다니던 천마의 모습을 그대로 따온 이름이다.

 

이카루가정 지정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있는 코마즈카 고분

 

아스카 시대의 고분이자 사키의 무덤인게 확실하지만, '말 무덤'이기 때문에 다른 사적지에 비해 관리가 잘 되고 있지는 않았다.

이렇다 할 펜스도, 관람로도 정비되어있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고분 위에 올라갈 수 있어 보였다.

 

고분 앞에 서있는 비석도 쿠로코마를 노래한 것이 아닌,

이 고분 앞에 살던 근왕지사 토모바야시 미츠히라(伴林光平 1813-1864)의 사세구를 적은 것이었다.

 

 

君が代は いはほと共に 動かねば くだけてかへれ 沖津しら浪

기미가요와 이와오토토모니 우고카네바 쿠타케테카에레 오키츠시라나미

님의 시대는 바위처럼 굳건하니 스러져 돌아가라 몰려오는 하얀 물결이여

 

 

고대 일본의 정치쳬계를 마련한 쇼토쿠 태자, 그 태자의 명마가 잠든 곳에서 존왕양이를 부르짖던 막말 근왕지사의 모습이 꽤나 대비된다.

전근대와 근대의 갈림길에 선 일본을 생각하기엔 제법 어울리지만, 역시 쿠로코마를 떠올리기는 어려운 사세구다.

 

 

그 대신 쇼토쿠 태자가 태어난 곳에 세워진 사찰,

타치바나데라(橘寺)에 건립된 태자와 쿠로코마를 노래한 가비를 대신 소개하며 마무리해본다.

 

くろこまの あさのあがきに ふませたる をかのくさねと なづさひぞこし

쿠로코마노 아사노아가키니 후마세타루 오카노쿠사네토 나즈사히조코시

쿠로코마의 아침 말발굽이 밟았던 언덕 위의 수풀이 그리워져 돌아왔나니

 

 

 

호류지 주소

奈良県斑鳩町法隆寺山内1−1−1

나라현 이카루가정 호류지산나이 1-1-1

 

코마즈카 고분 주소

奈良県斑鳩町東福寺1丁目39

나라현 이카루가정 토후쿠지 1초메 39

 

가는 방법

JR 야마토지선 호류지역 하차, 도보 20분 권내. 버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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