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리듬을 망쳤는지 꿀같은 토요일 새벽 3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요즘 마음도 싱숭생숭한데 다시 자려니 잠도 안 오고, 재충전 한번 하고 와야겠다 싶어서 그간 가보려다 못 갔던 교토부 야마자키(山崎)의 성지를 훌쩍 다녀왔다.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역인 한큐 오야마자키역에 도착하니 아직도 주변은 시커멓다
이때 시각이 6시 20분
오늘의 목표인 텐노산(天王山, 천왕산)을 가리키는 이정표
너무 일찍 도착한 김에 하이킹이라도 할 겸 무작정 산에 올랐다
일본의 문화 컨텐츠로 자리잡아 각종 매체에도 수없이 활용된 전국시대 무장들
야마자키는 전국시대의 피의 역사가 서려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거의 쟁패했을 무렵, 휘하 무장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혼노지의 변)
노부나가의 명에 따라 저 멀리 서쪽 지방을 공략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즉시 회군해 주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미츠히데와 결전을 벌이게 되고, 그 전투가 일어난 장소가 바로 이곳 야마자키.
그 뒤로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져있는대로 역사가 흘러 히데요시가 권력을 쟁취하고 임진왜란까지 이어지고..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야마자키 전투가 일어난 텐노산은, 이 산을 차지한 자가 천하를 지배하게 된다는 뜻으로 '천하를 가르는 텐노산 天下分け目の天王山'이라 불리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중요한 일전이나 승패를 판가름하는 국면을 일컫는 관용구로 곧잘 쓰인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산세가 깊어 등산하는 맛이 난다.
저 골짜기 골짜기마다 천하 쟁패를 위해 쓰러져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더 맛이 우러나고..
그렇게 산을 올라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JR 열차도 지나가고, 교토에서 흘러오는 카츠라가와랑 우지가와도 보인다.
건너편에 보이는 산에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이 진좌해있다.
산에 올라와서 보니, 역시 야마자키와 텐노산의 지리적 위치가 교통의 요지로 발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은 개간된 땅도 예전엔 다 습지나 초지였음을 생각하면 오사카에서 교토로 북상할 때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좁은 길이면서, 많은 강이 합쳐지는 합수부기도 하니..
야마자키 전투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다시 하산
그새 날이 밝아 올라갈 때보단 발이 가벼워졌다.
텐노산 등산로 초입에는 토리이가 서있고 왼쪽으로 작은 길이 나있는데, 이 길이 바로 오늘의 첫번째 목적지로 향하는 오솔길이다.
그렇게 도착한 첫번째 순례지, 호샤쿠지(宝積寺)
텐노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호샤쿠지는, 야마자키 전투 당시 히데요시의 본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때문에 절 이곳저곳에는 히데요시와 관련한 전승이나 사적이 꽤 남아있다.
오사카성을 건설해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는 이곳에 성을 지어 생활하기도 했다고.
호샤쿠지 자체는 나라시대에 교키(行基, 행기) 스님이 창건했다고 알려져있다.
백제계 도래인 가문 출신으로, 이따금 관련 서적에도 이름을 볼 수 있는 스님. 일본 최초로 대승정의 지위에 올라, 나라의 토다이지 창건을 주도한 큰스님으로 알려져있다.
호샤쿠지
종파 진언종
개산 교키
일반에는 타카라데라(宝寺)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야마자키정에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사전에 따르면 나라시대에 쇼무 천황의 칙원사(*천황의 기원에 따라 건립된 사찰)로 승려 교키가 개창하였다 알려져있으며, 그 뒤 쵸토쿠 연간(995~999) 쟈쿠소 스님(寂照, 적조)이 중창하여, 무로마치 초기에는 하치만궁 아부라자로부터의 기진도 많아 사세가 크게 번창하였다.
전국시대의 끝무렵, 야마자키 전투 때에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한때 당 사찰에 진을 세워, 전투 후 호샤쿠지도 야마자키성의 일부로써 이용되었다.
하지만, 막말의 동란은 호샤쿠지에도 영향을 끼쳐, 1864년의 병화와 폐불훼석의 바람으로 사세가 기울어버렸으나, 서서히 사역을 복구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현재, 당 지방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는 사원으로, 주목할만한 불상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호샤쿠지는 이렇듯 장구한 역사를 지닌 고찰인데, 개창에 관련한 흥미로운 전승이 하나 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723년, 당시 수도였던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몬무 천황의 아들, 오비토 황자는 병약하여 성인이 된 뒤에도 천황에 즉위하지 못하고 고모가 일본을 다스리고 있었다.
어느날 황자의 꿈자리에 용신이 나타나, 망치를 내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것을 왼손 손바닥에 두드리면, 한없이 많은 재복을 얻을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나자 용신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망치는 머리맡에 놓여있어, 황자는 망치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본인이 즉위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고 한다. 소원을 빌고나서 75일 뒤에 그것이 이루어져, 고모의 양위로 무사히 천황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쇼무 천황(聖武天皇)이 된 오비토 황자는 이후 용신을 가슴깊이 믿게 되어, 교키에게 명해 사찰을 세워 신의 도구인 망치를 봉납하게 했다.
현존하는 망치는 직경 15cm의 크기로, 비보로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문에 본당 오른편에는 오로지 망치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당우가 마련되어있다.
절분이 코앞이라 색색들이 복주머니로 치장된게 보기 예쁘다.
그 이름도 코즈치미야, 직역하자면 '망치의 궁전'이다.
이른아침이라 내부에 들어가보진 못했지만, 안에 대흑천(大黒天, 다이코쿠텐)상이 봉안되어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칠복신으로 모셔지는 대흑천은 보통 망치를 들고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인자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렇듯, 일본 문화에 깊숙히 스며든 '보물을 가져다주는 요술망치'의 이미지는 호샤쿠지의 창건과 함께 나타났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금운을 가져다주고 복이 충만해지는 위력을 지녔다는 요술 망치의 전승 덕일까, 망치가 그려진 깃발이 경내에 줄지어 서있었다. 용신이 가져다준 쇼무 천황의 망치에 대해 현대의 일본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편, 오니를 퇴치한 난쟁이 영웅을 다룬 전래동화 '잇슨보시 一寸法師'에서
주인공 잇슨보시는 오니를 퇴치하고 얻은 요술망치로 본인을 크게 만들어 재상의 딸과 결혼했다.
그 잇슨보시가 오사카에서 밥사발에 올라타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호샤쿠지에서 수행해 덕을 쌓았다는 전승도 있다니, 이래저래 요술망치와 호샤쿠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인연이다.
잇슨보시 전설, 나아가 요술망치와 관련된 이러한 전승은 스쿠나 신묘마루의 모티브가 되었으니, 호샤쿠지는 신묘마루의 원전과 관련된 중요한 동방 성지.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인데, 호샤쿠지에는 고려 감지은자법화경도 봉안되어 있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고 한다.
언젠가 박물관 전시에라도 출품되면 모습을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호샤쿠지 순례를 마치고 하산, 야마자키의 메인로드로 돌아왔다. 그새 날이 밝았다.
야마자키역에서 도보 1분만에 도착할 수 있는 또다른 성지, 리큐 하치만궁(離宮八幡宮)
리큐 하치만궁은 하치만신을 모시는 신사로, 859년 세워져 나날이 번성했는데, '이궁 離宮'이라는 표기에서 알 수 있듯 천황의 거처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당 신사는 정말 특이한 내력을 지니고 있어, '일본에서 최초로 기름을 대량생산한 곳'으로 숭상받고 있다.
죠간 연간(貞観, 859~877), 리큐 하치만궁의 신관이 신탁을 받아 착유기를 발명해 들깨 기름의 생산을 시작했다고 한다.
들깨에서 기름을 짜내는 방법이 전국에 널리 퍼져 기름 부족 문제가 해소되자, 리큐하치만궁은 조정으로부터 '유조 油祖'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직역하자면 기름의 원조, 또는 기름의 조상이라는 뜻이다.
중세 일본에서 기름은, 방습용 도료나 식용으로 쓰이기도 했으나, 주로 조명용 연료로 사용되었다. 특히 가장 많이 사용된 방법은 신사나 사찰의 석등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때문에 신사의 신관, 사찰의 스님들은 기름을 안정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직접 생산에 나서기도 했는데, 리큐하치만궁은 만성적인 기름 부족을 일거에 해소한 것이다.
그때문일까, 13세기 무렵부터 리큐하치만궁의 신관들은 조정과 막부로부터 특권을 인정받아 보호받으며, 교토와 오사카를 비롯한 칸사이 지역의 기름 생산을 독점하기에 이른다.
특히 시코쿠부터 시즈오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들깨 구입을 사실상 독점해, 자연히 정유한 기름을 판매하는 특권도 부여받아 날로 번성하게 되었다. 이를 '오야마자키 아부라자 大山崎油座'라 부른다.
야마자키의 상인과 리큐하치만궁의 신관은 결탁해 크나큰 부를 벌여들였고, 이게 놀랍게도 고전 소설에도 반영되어 동방에서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성련선 팬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신귀산연기에서 묘렌 법사가 바리때를 날려 수많은 쌀가마를 가져온 부잣집이 바로 '야마자키 장자山崎長者'의 집, 다름 아닌 오야마자키 아부라자의 집이었던 것이다.
야마자키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으나, 그림을 잘 보면 기름을 짜내는 착유기와 들깨를 찌는 가마도 그려져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잘 비추고 있다.
https://chohot-touhou.tistory.com/393
야마자키 장자와 관련된 신귀산연기의 내용은 해당 링크에 정리해두었다.
성련선 6면 최종스펠 비공원반과 관련된건 물론이고, 묘렌사 캐릭터들이 모으던 '비창飛倉의 조각'도 원래 리큐하치만궁에 있던 쌀가마 곳간이니, 성련선의 주요 성지임은 분명하다.
'부자'의 대명사로 에마키에 등장할 정도로 번창했던 리큐하치만구와 기름 상인들도, 점차 사양길로 접어든다.
각 지역의 다른 신사들이 앞다투어 기름 생산에 뛰어들고, 무엇보다 종교적 권위에 기초한 권력을 싫어했던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무로마치 막부의 6대 쇼군으로 등장하며, 더이상 정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전국시대로 접어들면, 각 지방에서 할거한 다이묘가 본인이 지배하는 지역의 경제를 집중적으로 성장시켜, 야마자키라는 한 지방에 근거한 상업이 전국을 지배하는 형태는 더이상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유채꽃에서 기름을 채취하는 방법이 개발되는 등, 야마자키의 기름 상인들이 설 자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과거의 영욕을 뒤로한 채, 지금의 리큐하치만궁은 지역의 수호 신사로 주민들의 신앙처가 되어주고있다.
또한 일본 제유 산업의 발상지라는 타이틀만은 건재해, 기름과 관련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찾곤 한다고.
기름과 관련된 영광과 탐욕의 세월에서, 어째선지 강욕이문의 스토리도 조금 겹쳐보였다.
석유 산업으로 쌓아올린 경제를 기반으로 월드컵을 유치하곤 노동자를 가혹한 환경으로 내모는 카타르나, 세계 각국을 상대로 자원과 관련된 협박을 일삼는 러시아도 떠오르고..
야마자키의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호샤쿠지
주소
京都府乙訓郡大山崎町銭原1番地
교토부 오야마자키정 제니하라 1번지
가는 방법
JR 교토선 야마자키역 or 한큐 교토선 오야마자키역 하차, 도보 15분
리큐 하치만궁
주소
京都府乙訓郡大山崎町大山崎西谷21−1
교토부 오야마자키정 오야마자키니시타니21-1
가는 방법
JR 교토선 야마자키역 or 한큐 교토선 오야마자키역 하차, 도보 3분
'동방 성지순례 > 서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년 아와시마 신사 순례기 (1) | 2023.02.09 |
---|---|
호류지와 코마즈카 고분 순례기 (3) | 2022.09.25 |
교토 뒷골목에서 누에 성지 찾기 (0) | 2022.01.03 |
키타마에부네 선주의 저택 (1) | 2021.09.07 |
스즈노야와 이세 신궁 (1) | 2021.08.29 |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