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호쿠리쿠 본선 타케후역

이번 여름은 이래저래 바쁜 일들이 많아서 어디 멀리 며칠간 성지순례 갔다올 짬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당일치기로 갔다올 수는 있는데, 너무 깡촌에 있어서 그간 가보지 못했던 성지를 가보기로 했다.

 

오사카에서 열차를 올라타 장장 3시간, 후쿠이 에치젠시의 관문 타케후(武生)역에서 하차한다.

 

이번에 다녀온 성지는 시청 소재지에서도 50분을 더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하는 바닷가 어촌에 있었다.

하루에 딱 3번 있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손님은 나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도착한 코우노(河野) 마을

 

1000명 남짓한 인구가 살고 있다는 조용한 어촌

오후 1시쯤 도착했는데 문을 연 상점이 하나도 안 보였다.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해변 공원이 있었는데, 코로나 방역 대책으로 폐쇄되어있던 상태였다.

저번주에 오사카 근교 해수욕장에 놀러갔다 왔는데, 거긴 개방되어있어서 피서객도 많았었다.

일본도 지자체 별로 정책이 많이 다른듯?

 

그렇게 아무도 없는 해변가를 따라 5분 정도를 걸어간다.

날씨도 선선하고 고즈넉하니 좋았다.

 

코우노 키타마에부네 선주 거리 도착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관광 자원인지라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이번 순례의 목적지, 키타마에부네 선주의 저택 우콘가 (北前船主の館 右近家)

 

 

키타마에부네 선주의 저택 우콘게(우근가)의 안내

 

에도 중기부터 메이지 중기에 걸쳐, 오사카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상선 '키타마에부네'가 융성하였습니다.

 

우콘 가문이 소유한 해당 저택은, 먼 옛날 동해(일본해) 연안 지역을 대표하던 키타마에부네 선주의 집입니다.

지금은 도쿄에 거주하고 있는 당주의 호의를 입어, 키타마에부네의 자료관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이곳에는 부지 내의 도로를 끼고 산 쪽에 저택과 다실 등 5동이, 바다 쪽에는 행랑과 창고 등 4동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택은 메이지 34(1901)년 새로 건립된 것으로, 교토 양식의 2층 맞배집입니다. 호쾌한 정취 속에 기품이 느껴지는 건물입니다.

 

또한, 뒷산 중턱에는 쇼와 9(1934)년 세워진 화양절충의 서양관과 와카사만을 전망할 수 있는 정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건물 내에는 당시의 키타마에부네 관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내문에 나와있듯이, 이 저택은 동해(일본해) 연안에서 상업을 전개하던 상단의 거물이 소유하고 있던 곳이다.

입장료는 500엔인데 내부 전시가 워낙 좋아서 아깝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키타마에부네의 항로, 우콘 저택은 츠루가(敦賀) 부근에 있다.

18세기에 등장한 키타마에부네는 키타마에부네 상단은 오사카에서 홋카이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연안 항해하며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오사카 부근에서 술, 소금, 사탕, 면직물, 담배, 종이 따위를, 츠루가에서 밧줄과 돗자리를,

니이가타에서는 쌀을 주로 사들여 홋카이도에 매각해 수익을 올린 뒤

홋카이도에서는 청어박(청어 수천 마리를 함께 끓인 뒤 압착해 수분과 물고기 기름을 뺀 찌꺼기. 비료로 애용됨)을 사들여 다시 일본 각지에 팔았다고.

 

즉, 각지의 항구에서 해산물이나 명산품을 사들여 선적한 뒤

최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항구에 기항해 무역품들을 팔고 또다시 명산품을 사들여 출항하는 방식

예전에 즐겨했던 대항해시대 게임에서 경험한 무역이랑 완전히 똑같다.

 

저택 내부에는 키타마에부네의 무역과 항해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초중딩때 대항해시대에 흠뻑 빠져 맨날 플레이했었던지라 엄청 재밌게 읽었다.

 

메이지 시대, 키타마에부네 상단의 사진

해당 자료관에는 각지의 항구에서 알아온 상품별 매매 가격을 적은 수첩이 대량으로 남아있었다.

이는 어디에서 상품을 구매하고 어디에 팔아야 가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자료인데

이러한 상품의 '정보'를 이용해 키타마에부네는 성장한 것이다.

 

물론 연안 항해 기술과 광대한 정보 네트워크가 받쳐줘야하는 엄청난 장사 수완.

 

저택 앞 바닷가에 있던 키타마에부네 모형

허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이 개화기에 접어들고, 멀리 떨어진 지역 간에도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전신이 보급되었다.

전신의 보급은 전국 각지의 상품 가격을 균일화 시키는 영향이 있었고, 가격차를 이용한 연안 항해 상업은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게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범선을 증기선으로 바꾸는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지만, 대부분의 키타마에부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손보 재팬 빌딩

하지만 코우노의 우콘 가문은 시대의 광풍 속에서도 흐름을 읽어 재빨리 변화를 꾀해 살아 남았다.

다름이 아닌 해운 사업의 위험성을 담보해주는, '일본해상보험'을 창설해 물류 사업에서 보험으로 대규모 사업 전환을 꾀한 것이다.

 

1887년 우콘 가문이 창설한 일본해상보험은 '손해보험 재팬'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도 대기업으로 번창중이다.

에도시대에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항해하던 키타마에부네 선주 우콘 가문의 명맥이, 해상보험 사업에서 여전히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키타마에부네 선주 가문들과 달리 근대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부를 축적한 우콘 가문은, 저택 뒤 언덕배기에 '서양관'을 건축한다.

 

저택 뒷뜰에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5분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서양관

 

서양관이 위치한 산 중턱은 워낙 협소해 제대로 전경을 찍을 수 없었는데, 내려가 길 반대편에서 찍으니 그나마 좀 보였다.

 

1934년에 건축된 이 서양관은 11대 우콘 가문 당주인 우콘 곤자에몬(右近権左衛門)의 지시로 건축한 것인데,

1929년 전세계를 덮친 대공황의 영향으로 고향 마을의 지역경제가 피폐해지자 대형 건축 사업을 통해 돈이 흘러들어가게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고 알려져있다.

실제로 우콘 가문은 대공황 이후 이 서양관뿐만아니라 터널, 제방 등 다양한 토목사업을 주도했다고.

 

서양관과 작은 연못, 바다만 보면 정말로 유럽을 방불케하는 정경

 

언덕배기에 위치한지라 온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포인트이기도 했다.

확실히 유서깊은 어촌마을 답게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보인다.

 

서양관 1층 내부 모습

당시 일본에는 흔치 않았을 서양식 거실, 샹들리에, 각종 가구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그리 크진 않지만 마을 유지들과 연회를 벌이기에 적당했을 거실

 

안쪽 방에는 또다른 식사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상이 키타마에부네 우콘 가문 저택과 서양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었는데, 그렇다면 대체 어떤 동방 요소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해답은 바로 서양관의 현관문에 담겨 있다.

 

정답은 바로 요요몽 3면 앨리스의 스코어 화면에 사용된 배경.

우콘 저택 서양관의 현관 내부 문과 완전히 일치한다.

 

아쉽게도 시설 노후화 영향으로 내부 현관문은 상시 개방 상태로 고정시켜 둔지라 게임과 완전히 동일한 구도를 얻을 순 없었지만 요요몽 스코어 화면의 모티브가 이곳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주 ZUN은 대체 왜 이곳을 모티브로 따왔을까?

 

어차피 하루에 3편밖에 없는 버스 시간도 한참 남았겠다, 나 빼고 관람객은 한 명도 없겠다,

문의시 서양관의 건축사적 의의와 역사에 대한 해설이 담겨있는 DVD를 틀어준다는 문구가 적혀있길래

서양관을 관리하시는 아주머니께 커피를 주문하고(300엔) DVD를 청해 감상했다.

 

무슨 DVD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봤는데,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보니 1998년에 방영된 NHK의 교육방송 'NHK 인간대학'의 한 코너였다고.

도쿄 대학의 교수로도 재직중인 건축사가 후지모리 테루노부(藤森照信)가 일반인도 알기 쉽게 해설을 해줘서 외국인인 나도 이해하기 쉬웠다.

후지모리는 해당 서양관의 연구에도 크게 이바지했다고.

 

모리야 신장관 자료관

나중에 알고보니 후지모리 테루노부는 건축가로선 모리야 신장관 자료관 건축으로 데뷔하였으며,

스와 출신으로 모리야 사나에씨와도 인연이 깊다고 한다.

 

정말 동방 설정을 파다보면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연결고리가 생겨서 너무 재미있다.

 

각설하고 다시 서양관과 동방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서양관은 서양의 각종 양식을 혼합해 만든 매우 의미깊은 건축물이라고 한다.

 

1층은 스페니쉬 건축 양식이고 2층은 스위스 샬레 지방의 건축 양식을 따왔다는데

지중해에 면한 스페인에서 생긴 건축 양식인 스페니쉬 양식의 경우 따뜻한 일본 지방(세토우치 등)에도 많이 도입되었지만

알프스 고산지대인 스위스 샬레 지방의 건축 양식이 근대기 일본에 도입된 사례는 이 저택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한다.

 

확실히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1층과 2층의 건축 양식은 판이하게 달라보인다.

1층은 지중해변을 무대로한 영화에서 자주 나올듯한 스타일..

 

서양관 2층 발코니
스위스 샬레의 건축양식

샬레의 건축양식은 본 적이 없으니 바로 이해하긴 힘들었는데, 사진을 보니 확실히 알프스에 있을법한 느낌의 건축이다.

 

해당 저택의 큰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잉글눅(Inglenook)

잉글눅은 날씨가 좋지 않은 영국에서 고안된 공간인데, 난롯가에 사람 두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불을 쬐며 차를 마실 수 있게 한 곳이라고 한다.

이 또한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으로 궂은 날이 많은 코우노 마을에 잘 어울리는 공간으로, 본래 온화한 지역에 세워지는 스페니쉬 양식과는 이질적인 과감한 선택이라고.

 

심지어 잉글눅 내부 장식은 아랍인이 창안한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수놓아져, 저 1평 남짓한 공간에 수많은 문화 요소들이 어우러져 있다.

 

계단참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키타마에부네 우콘 가문의 문장인 이치젠바시가 자랑스럽게 새겨져있다.

이치젠바시(一膳箸)는 한자 그대로 젓가락을 눕혀놓은 형상

 

 

2층으로 올라가면 또 의외의 공간이 펼쳐지는데, 외관은 스위스 샬레 양식으로 마감했으면서 내부는 완전히 일본 고유의 다다미방이다.

 

서양관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주요 사용되었는데

1층에서 당시로선 최첨단이었던 서양식 연회를 벌인 뒤 2층으로 올라와 일본인에 맞는 다다미방에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휴게 공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장황하게 써놓았지만, 요컨대 해당 서양관은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를 응집시켜 활용한 건축사적 걸작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앨리스의 집과 서양관의 외관이 일치하진 않지만, 서양관의 건축사적 의의를 캐릭터 그 자체에 대입해보면 꽤나 흥미롭다.

 

앨리스는 동방 세계관에서 독보적으로 '다양한 문화권'을 배경에 둔 캐릭터로 그려진다.

 

프랑스 / 네덜란드 / 런던 / 러시아 / 티베트 / 상하이 / 교토의 인형을 다루며, 일본의 환상향에서 서양식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앨리스와

스페인 / 스위스 / 잉글랜드 / 아랍 / 고딕 / 바로크 / 일본의 다양한 양식을 유익하게 활용하여 건립된 서양관

 

메이지 유신과 상하이 조계로 대표되는 격동의 시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적응하여 살아온 두 객체의 이야기가 퍽 닮아있지 않은가?

ZUN은 이런 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앨리스의 스코어 화면 배경을 키타마에부네 우콘 가문이 지은 서양관으로 채택한게 아닐까?

 

우콘 가문 11대 당주 우콘 곤자에몬의 초상

전술한 건축가와 모리야의 인연처럼, 이 저택을 건립한 우콘 곤자에몬은 흥미롭게도 한국사의 단편에도 등장한다.

일본해상보험을 설립하고 승승장구하던 곤자에몬은 식민지 조선에도 진출해 다양한 사업들을 전개하는데, 각종 해운업이나 지역 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중 하나 굵직하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례가 있는데

국사 교과서에서 '암태도 소작쟁의'와 함께 다뤄지는 '하의도 농민운동'에서 토지를 매수했던 일본인 지주가 바로 우콘 곤자에몬이었다.

 

그 무렵 하의도에서 김대중이 태어나서 나중에 대통령이 되니..

흥미롭다면 흥미롭고 얄궂다면 얄궂은 연결고리인데, 정말 모든 역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이 다시 들게 된다.

 

어쨌든 이렇게 저택 구경을 마치고 다시 마을로 내려온다.

코우노에는 키타마에부네가 활동하던 당시의 오래된 살림집들이 많아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마을 끝까지 가봤는데, 걸어서 20분도 안 되어서 끝자락에 도착했다.

 

사실 또 재미있는건 마을 북쪽 끝은 원래 '이마이즈미 今泉'라고 해서 코우노와는 다른 항구였는데, 도로확장공사를 통해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동방의 이마이즈미 카게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어쩌면 먼 옛날 늑대가 살고있었을지도 모를 이마이즈미 마을의 모습

 

그렇게 한참 마을을 산책하다 에치젠으로 가는 버스를 집어타 돌아갔다.

키타마에부네의 역사와 동방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었던 여정, 칸사이 여행 중 하루쯤 말미를 내어 코우노 순례를 떠나보는건 어떨까?

 

 

키타마에부네 선주의 저택 우근가

 

주소

福井県南条郡南越前町河野2−15

후쿠이현 미나미에치젠시 코우노 2-15

 

가는 방법

JR 호쿠리쿠 본선 타케후역에서 출발하는 '후쿠테츠 버스 오시오 코우노선 福鉄バス王子保・河野線' 이용.

코우노 정류장 하차, 약 50분 소요

 

https://fukutetsu.jp/bus/timetable.php

편수가 적으므로 홈페이지에서 시각표 확인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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