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홍색 백색은 예로부터 경사스러운 날에 쓰이는 색 조합으로, '대항하는 두 팀'을 뜻하는 색이기도 하다

유명한 예로 NHK의 홍백가합전이 있는데, 일본에선 두 팀의 대결을 뜻할 때 '홍백전'이라고 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때 전래되어 홍백전이라는 말을 쓰다가 왜색을 이유로 '청백전'으로 바뀐 것이다.

 

 

이 홍백의 유래는 겐페이 전쟁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겐씨(源氏, 원씨)와 헤이씨(平氏, 평씨)는 일본 황실을 섬기던 유력 무사 가문으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12세기에 겐페이 내전이 벌어졌다.

이 때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겐씨가 백기를, 헤이씨가 홍기를 내걸고 싸웠기 때문에 일본에선 전통적으로 '대조적인 두 가지'를 뜻하는 색이 되었다.

겐씨는 '미나모토', 헤이씨는 '타이라'라고도 부르며, 군담문학에서 헤이씨는 곧잘 '헤이케 平家'라 불린다.

 

동방에도 겐씨와 헤이씨를 모티브로 한 스펠카드도 몇 개 있으니 알아보고 가보자

 

 

 

 

 

먼저 영노말 케이네 2번스펠 야부「마사카도 크라이시스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는 헤이씨의 무사로, 지금의 관동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본인을 '신황 新皇'이라 칭하고 황실을 공격했다.

케이네의 2번스펠 크라이시스 시리즈는 천황가가 위협을 받던 때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진 스펠로,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유명 반역자 마사카도도 황실 존속의 위기로 꼽혀 스펠카드가 되었다.

 

 

 

 

 

 

다음은 휘침성 벤벤 2번스펠 원령「귀 없는 호이치」 / 원령「헤이케의 수많은 원령」

 

귀 없는 호이치(耳無し芳一)는 헤이씨 일가를 모신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을 무대로 한 설화다.

호이치는 비파를 연주하던 맹인 스님으로, 귀 없는 호이치는 헤이 가문의 원령들을 불러내 비파를 켜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눈이 보이지 않는 호이치는 어느 무사의 부탁으로 고귀한 인물의 저택에 비파를 연주하러 자주 가게 되는데

당연히 눈이 안 보이니 관객이 많은지 적은지도 알 길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듯한 느낌이 들어 열심히 비파를 켰다고 한다.

 

호이치가 가장 좋아하던 악곡은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인데, 이는 타이라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린 작품이다.

헤이케 무사들이 비장하게 싸우다 전멸하는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 부분에 이르자 관객들이 흐느껴 호이치도 내심 감동했다고 한다.

 

절의 주지 스님이 호이치가 매일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추궁했으나 호이치가 대답하지 않아 몰래 미행을 붙인다.

그러자 호이치는 장대비를 맞아가며, 어느 묘지 앞에서 비파를 타며 헤이케 이야기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묘지는 타이라 가문 출신으로 천황이 되었으나 8세의 나이로 단노우라 전투에서 사망한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의 묘지였고,

밤마다 호이치를 불러낸 것은 타이라 가문의 원령들이었던 것이다.

 

주지스님은 호이치를 내버려두면 원령들이 호이치를 죽일 것이라고 여겼으나, 본인은 밤마다 법회가 있어 호이치를 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주지스님은 호이치의 온 몸에 반야심경을 필사해 호이치를 지키기로 하였다.

 

 

그날 밤, 전신에 경문을 쓴 호이치가 방에 혼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매일 그랬듯이 무사(헤이케의 원령)이 호이치를 맞이하러 왔으나, 경문의 효험으로 원령은 호이치를 보지 못했다.

호이치가 대답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 원령은 당황하며 「대답이 없군, 비파는 있지만 호이치는 없다니...」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원령은 호이치를 찾기 위해 절을 샅샅이 뒤지고, 주지스님이 깜빡하고 불경을 적지 않은 귀를 발견해

「아아, 대답을 할 입이 사라졌던게로군. 비파 악사는 귀만 빼고 사라져버린게야. 그렇다면 위에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이 귀를 증거로 가져가야겠군」

이라 말하며 귀를 잘라갔다고 한다.

 

그 뒤로 헤이케의 원령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호이치의 명성은 드높아졌다고 한다.


 

비파의 츠쿠모가미인 벤벤과, 비파와 관련된 유명 설화인 귀없는 호이치를 접목시킨 스펠카드이다.

 

 

 

 

마지막으로 휘침성 벤벤 1번스펠 평곡「기원정사의 종소리」 / 야츠하시 1번스펠 금부「제행무상의 고토 소리」가 있다.

 

평곡이란 일본 문학의 일종으로, 비파 악사가 읊는 헤이케모노가타리를 뜻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첫구절은 기원정사(祇園精舎)를 언급하며 시작되는데, 기원정사는 석가모니가 생전에 설법을 한 것으로 유명한 사원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모든 것은 항상 매 순간마다 변하고, 흥하며, 또한 망하고 있다는 불교의 교리 중 하나이다.

 

타이라씨의 흥망성쇠를 묘사한,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첫구절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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祇園精舎の鐘の声 기원정사의 종소리

諸行無常の響きあり 제행무상의 울림이어라

 

沙羅双樹の花の色 사라쌍수의 꽃잎 빛깔

盛者必衰の理をあらはす성한 자는 반드시 쇠망한다는 이치를 나타내누나

 

驕れる者も久しからず 교만한 자는 오래가지 못하니

ただ春の夜の夢の如し 한낱 봄날 밤 꿈과 같느니라

 

猛き者も終には滅びぬ 용맹한 자도 마지막엔 멸망하느니

偏に風の前の塵に同じ 오로지 바람 앞의 티끌같은 처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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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페이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하긴 힘들지만,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파생된 스펠카드로

문화첩 요우무 스펠카드 사생검「불심 없는 중생의 울림」이 있다.

 

이는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첫구절 '제행무상의 울림'의 일본어 발음이 '불심 없는 중생의 울림'과 비슷한 것에서 따온, 말장난 스펠카드명이다.

 

 

 

다시 홍백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일본에서 홍백이 경사를 뜻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민속의 주요 세계관으로 하레와 케(ハレとケ)라는 개념이 있는데

하레는 비일상・경사스러운 일・제사를 뜻하는 개념이고, 케는 일상・평소 생활을 뜻한다.

 

일본의 많은 민속적 요소들은 하레와 케로 이분화되어있으며, 지금까지도 일본 문화에 내재된 중요 키포인트이기도 하다.

이 '하레와 케'는 풍신록 EX 필드곡인 '내일은 하레의 날, 어제는 케'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는데

EX보스 스와코가 대사 중 '신과 노는 탄막 축제'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하레는 동방 세계관에서도, 특히 신앙과 관련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붉은 색은 하레를 뜻하여, 경사스러운 날에는 붉은 팥밥을 먹곤 했다.

또한 경사 때 으레 나오는 떡이 하얀 색이었으므로, '홍백 조합은 경사스럽다'라는 신앙이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또다른 설로, 빨간 색 피부로 상징되는 갓난아기 = 출생과, 하얀 수의로 상징되는 죽음을 대조시켜 홍백은 사람의 일생을 표현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잘 생각해보면 홍백은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에도 쓰이는 색이며

축제・제사・각종 예식 등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일본인들이 참 좋아하는 색 조합임을 알 수 있다.

 

 

 

 

 

 

남들보다 운이 좋다는 레이무가 홍백의 무녀를 표방한 것도 이런 사항들로부터 유래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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