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방문 성지 위치
시모스와역 플랫폼, JR 츄오본선 보통열차

시모스와 지역의 성지를 다 돌았으니 이제 열차를 타고 치노(茅野)로 향한다.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열차가 다니니 기차 시간에 주의해야 한다.

 

조금 이른 점심을 치노역 구내 서서먹는 소바집에서 먹었다.

 

신슈 하면 소바!
300엔대에 이렇게 맛있는 밥을 간편히 먹을 수 있다니.. 괜히 타베로그 별점이 높은게 아니었다.

 

역 앞의 온바시라

치노역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 모리야산으로 향한다.

하계 기간은 모리야산 등산로 초입까지 버스가 다니나, 동계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모리야산 입구로 데려가달라는 내 말에 기사님이 의아해하시며 한겨울에 무슨 산을 가냐고 물었다.

그래서 유학생인데 일본의 문화나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스와 대사의 신체산이라 불리는 모리야산에 꼭 한번 가보고싶어서 오른다고 하니, 신기해하면서도 퍽 기쁜 눈치였다.

 

기사님한테 등산로에 대해 이것저것 여쭈다보니 그새 초입에 도착해있었다.

운임은 2000엔, 가난한 자취생에겐 뼈아픈 금액이지만 모리야산은 그를 기꺼이 투자할만큼 스와 신앙의 중요한 장소이다.

 

모리야산 등산로 초입 / 곰 출몰 주의 표지판

생각해보니 일본의 산, 그것도 나가노의 심심산골에는 심심찮게 곰이 출몰한다.

좀 걱정이 되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오를 수밖에...

 

 

모리야산에도 다양한 루트가 있는데 내가 택한 길은

츠에츠키토우게 (杖突峠)라는 고개에서 올라가 정상을 찍고 타테이시(立石)로 내려오고, 국도를 따라 모리야 신사까지 걷는 루트였다.

 

츠에츠키 고개 무료 전망대에 들르는 시마린
애니메이션 9화 중

사진을 찍는걸 깜빡해서 너무 아쉬운데, 츠에츠키 고개는 만화・애니메이션 '유루캠'의 성지이기도 하다.

주인공 시마 린이 혼자서 바이크 여행을 떠나다 스와시내 사진을 찍는 곳

 

츠에츠키 고개에서 모리야산으로

그래도 아이젠은 챙겨갈걸 후회했다. 배낭여행에 무슨 아이젠을 챙길 수 있겠냐마는.

지금 생각해보면 운동화 한켤레에 등산양말만 신고 무슨 겨울 산을 올라가겠다고 객기를 부렸는지..

 

모리야산은 표고 1651m의 산으로, 일몬 남알프스의 최북단에 위치해있다.

동으로는 야츠가타케 연봉을, 북으로는 스와호를 조망할 수 있어 등산객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헌데 이 산, 이름이 '모리야' 산이지 않는가. 그런데 한자 철자는 守屋를 쓴다.

스와의 모리야라 함은 토착신 '모리야신 洩矢神'인데, 守屋는 중앙호족이었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산은 고대로부터 스와의 '모리야'와 야마토의 모노노베 일족을 아우르는 신앙이 깃든 곳이었다고 한다.

 

도중에 볼 수 있었던 모리야산 산장, 겨울이라 휴업중이었다.

우선 스와의 '모리야신'과 '모리야산'에 대해서 짚어보자.

 

모리야신은 누구인가? 고대로부터 스와를 다스리고 있던 토착신이자

중앙에서 온 타케미나카타와 싸워 패배했지만 신장관 가문 모리야씨(守矢氏)의 시조가 된 신이고

'미샤구지 ミシャグジ' 그 자체라고도, 또는 미샤구지 위에 있는 신이라고도 한다.

동방에서는 모리야 스와코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모리야씨족은 모리야산을 중하게 여겨, 먼옛날부터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열었다고 한다.

 

모리야산 등산로

 

잠시 일본어 사전에서 신체, 신체산, 그리고 칸나비라는 단어에 대해서 찾아보자.


【신체 神体】

신령이 깃드는 것으로 사람들이 모시는 무언가.

제사 및 예배의 대상으로 쓰이는 신성한 물체. 예로부터 거울・검・옥・창・조각 등이 자주 사용되었다.


【신체산 神体山】

신령이 깃드는 산으로, 제사 및 예배의 대상이 되는 산.

 

【칸나비 神奈備

예로부터 신령이 진좌한다고 알려져있는 산이나 숲


영화 '너의 이름은'에 등장하는 신체산

일본 신토는 고대로부터 산악신앙이 크게 발달했으며

산 그 자체를 신이나 신이 깃드는 대상으로 모시는 신앙도 융성하였다.

 

이때문에 모리야산은 스와 대사의 신체산으로 여겨져 신앙의 대상이 된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는 정확한 사실일까?

 

환상향의 현인신, 코치야 사나에

 

신화에서 엄연히 모리야신은 패배했고, 스와 신앙의 믿음은 타케미나카타를 모시는 스와씨(諏訪氏)로 집결되었다.

때문에 스와 신앙의 주신, 타케미나카타가 깃드는 신체 또한 스와씨족의 현인신(現人神)이었다.

 

현인신은 인간이며 동시에 신인 존재를 뜻하는데, 2차대전 패배 이전까지의 천황을 생각하면 편하다.

스와 지방에서 '스와씨' 또한 대대로 현인신을 배출하며 스와 신앙의 주축으로 기능했다.

 

To Mt. Moliyasan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모리야산은 신체산이 될 수도, 될 자격도 없었다.

고문헌에도 모리야산이 신체산이라는 문장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스와대사도 공식적으론 지금까지 부정 중이다.

※ 딱 하나, 1253년에 쓰인 '스와 노부시게 해장 諏訪信重解状'이라는 문서에는 타케미나카타가 모리야산 기슭에 강림해, 모리야신과 패권 다툼을 한 뒤 스와 대사를 창건했다는 구절이 있다.

패전 후 인간 선언으로 현인신의 지위에서 내려오게 된 일본의 천황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로 쓰인 문건에서는 판도가 달라진다.

정부의 명령으로 천황을 제외한 현인신이 부정되고, 스와씨의 현인신 또한 더이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믿음의 대상'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림판으로 정리해본 스와신앙과 동방풍신록

 

그때부터 모리야씨를 위시로 해 민간에서 신앙되어오던 모리야산이 신앙의 대상으로 급격히 부상했는지

관련된 많은 문헌들을 찾을 수 있다.


모리야산을 신성시하여 제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스와신사의 연구 諏訪神社の研究』 - 宮地直
모리야산은 신산神山 이다 『스와묘진지 諏訪明神誌』 - 山田肇
모리야산은 신체산이다 『스와신사에 대한 관견 諏訪神社に対する管見』 - 座田司

스와의 사람들은 모리야산을 신체로 여겼다 『온바시라 이야기 御柱の話』 - 折口信夫 
스와대사 카미샤 혼미야에서는 숲과 산을 신성한 담으로 둘러싸 숭배하였다 『일본의 종교 日本の宗教』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고비, 워낙 가파르고 미끄러워 애를 먹었다.

그렇게 고대로부터 신앙되어오던 모리야산은, 지금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스와 신앙의 신체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리야산 서쪽 정상, 동봉보다 20m가량 낮다


야사카 카나코의 이름 카나코(神奈子)는 상술한 칸나비(神奈備)에서 따왔다고 여겨진다.

 

스와 신앙에서 신령이 깃든다고 알려져있는 산, 칸나비는 곧 모리야산이니,

모리야산은 카나코의 이름을 따온 성지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동봉 정상. 일본 전망 좋은 산 100선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렇게 오르고 또 올라 모리야산 정상에 도착했다.

1650.3m, 오랜만에 산에 올라 힘들기도 했지만 정복감이 정말 짜릿했다.

 

높이도 올라왔다

 

밑으로는 얼어붙은 스와호와 스와 시가지가 보인다. 전망 하나는 진짜 죽여준다.

낡은 핸드폰 카메라로는 저 풍경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게 너무도 아쉬웠다...

 

야츠가타케 연봉

동쪽으로는 휘달리는 야츠가타케(八ヶ岳) 연봉이 보인다.

 

야츠가타케는 나가노에서 야마나시까지 이어지는 연봉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1200여년 전까지는 야츠가타케의 텐구악(天狗岳) 또는 아미타악(阿弥陀岳)이라는 봉우리가 후지산보다 큰 일본 최고봉이었는데
화산 분화 또는 지진으로 인해 붕괴해 후지산보다 낮아졌다고 한다.

 

하산 중에 찍은 야츠가타케

야츠가타케가 환상들이한 모습이 요괴의 산이라는 말이 맹월초 소설판에 나오니, 야츠가타케도 분명한 동방의 성지이다.
실제로 야츠가타케에는 텐구와 캇파 등 요괴들이 살고 있다는 설화가 다수 있다.

언젠간 올라봐야지...

 

작은 대피소
모리야산 산정 래빗 하우스, 자유롭게 이용해주세요

동봉 바로 앞에는 작은 대피소가 있어 쉬어갈 수 있다.

그림이 너무 귀엽다..

 

내부 풍경

무인 대피소인데도 아주 깨끗하고 예쁘게 유지되고 있는게 놀라웠다.

 

방명록이 있어 펼쳐보니 역시나 동방 성지순례를 하러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었다

사나에쟝 귀여워용

 

시가지 마트에서 미리 사온 삼각김밥을 먹으며 체력을 보충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동봉에서 서봉으로 향하는 길, 어느 사당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름은 모리야 신사 오쿠미야

 

돌사당 앞에는 활이 안치되어 있고,
새전함에는 모리야신사 오쿠미야 모노노베노 오오무라지 오오카미 산길 안전의 신이라고 쓰여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바로 알았겠지만

이 신사의 모리야는 모리야신의 모리야(洩矢)가 아닌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모리야(守屋)이다.

 

후토쟝

신령묘의 등장인물 모노노베노 후토의 모티브는 후츠히메(布都姫)로,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여동생이다.

뭐 이름은 후츠히메에서 따왔지만, 스펠카드나 설정은 거의 다 모리야에서 따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중앙 야마토 지방에서 활동했던 고대 호족인 모노노베를 모시는 신사가 스와의 모리야산에 있는 것일까?

발음이 똑같은 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모노노베노 모리야

쇼토쿠 태자와 소가씨가 대륙으로부터 불교를 들여오려고 했을 때,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배불파의 선두에 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배척했다.

(후토의 스펠 폐불의 염풍을 생각하면 편하다)

 

모리야 신사 토리이

군사를 일으켜 소가씨를 치려고 했던 모노노베씨는 패배해 멸족을 당했고(정미의 변),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현인신 가문 스와씨의 전승에 따르면,

모리야(守屋)의 차남 타케마로(武麿)는 스와로 도망쳐 모리야산에 숨었고, 이윽고 모리야(守矢)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신장관이 되었다고 한다. 

 

현판, 모노노베노 모리야 신사라고 정확히 적혀있다.

그렇게 스와에 살게 된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후손들은

조상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모리야신'을 섬기며 지금까지도 모리야산 주변에 살고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모리야 신사가 자리잡고 있는 이와쿠라 지구에는 모리야(守屋) 성을 지닌 사람들이 다수 살고 있다고.

 

결론적으로,

중앙의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스와의 모리야신, 그리고 모리야산의 발음이 똑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이자 역사의 장난이다. 


그러나 똑같은 발음을 가진 두 신이 한 곳에 우연히 공존한다는게 말이 되냐며 지금도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고대사는 적은 사료에 의존해야하기 때문에 신중히 접근해야한다.

모리야신과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섣불리 연결하여 사실은 모리야신도 외래신이었다! 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든 아니면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든

동덕으로서 신령묘와 풍신록을 이어볼 수 있다는 건 참 즐거운 이야기이다.

 

본전 모습, 경내가 너무도 협소해 정면 모습을 찍을 수 없었다.

스와 신앙과 모노노베, 풍신록과 신령묘.

모리야신과 연관이 깊어, 신장관 가문이 숭상했으며, 카나코의 이름 모티브이자, 중앙호족까지 엿볼 수 있는 곳.

 

여러가지 키워드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어 즐거웠던 모리야산 성지순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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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나가노현 이나시 타카토오마치 후지사와

長野県伊那市高遠町藤沢

 

가는 방법

JR 츄오본선 치노역 하차

하계 버스이용(https://mb.jorudan.co.jp/os/bus/1322/line/26175.html 참조)
동계 도보나 택시 이용

 

 

스와의 칠목칠석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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