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0년간 오타쿠로 살아오며 단언 가능한 사실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은 신카이 마코토고, 그의 작품중 '초속 5cm'를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중1 겨울 무렵 기말고사가 끝나고 남는 잉여 수업시간에 어느 선생님께서 이 영화를 틀어주셔서 처음으로 보았다.
마침 영화 1부 속 주인공들의 나이와 같은 때였다.
국어 교과서 지문 속의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조차도 간질거리는 자극으로 다가오던 나이였다.
소중한 친구이자, 어쩌면 연인이었을 아카리를 만나러 눈발을 헤치고 도치기의 작은 마을로 떠난 타카기가, 기약없는 기차를 차디찬 대합실에서 기다려준 아카리와 나눈 첫키스는, 어린 나의 기억에 선명히 남았다.
중학교때 처음 봤던 때의 초속 5cm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극장재개봉으로 보았던 초속 5cm는 분명히 달랐다.
그리고 아마 지금 다시 보아도 다를 것이고, 10년 뒤 보면 또 다를 것이다. 필시 전부 다 간질거릴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 처음 발을 디디고 맞이한 겨울에 초속 5cm의 무대를 찾아간 일은 아마 필연적이었다.
초속 5cm가, 수능 참고서에서 닳도록 나오는 '문학작품 속에서 하얀 눈은 역경을 상징한다.'라는 문장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하는 사진과 설명 위주로 채운다.
JR히가시니혼 오야마역(小山駅)의 료모선 플랫폼.
타카기는 강설로 발이 묶인 오야마역에서 아카리가 준 편지마저 잃어버리고, 깊은 실의에 빠진다.
이미 약속시간은 한참 지난 시각, 장면이 바뀌며 드러나는 정적 속에 몸을 움츠리는 타카기의 모습은 그의 절망감을 오롯이 드러낸다.
타카기는 이후 아카리가 차라리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눈이 내려도 가야만 하는 자신과, 미안함에 돌아가주길 바라는 마음. 중학생 1학년짜리 남자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무게였을까.
연착을 반복하면서도 기차는 나아가 아카리가 기다리는 이와후네역(岩舟駅)에 도착한다.
그리고, 대합실 난로 앞에는 몇 시간 동안이나 타카기를 기다리던 소꿉친구 아카리가 앉아있다.
영화는 여기에서 클라이맥스를 맞이한다.
이와후네역은 현재 완전 무인화되어 1995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와는 내부 모습이 약간 달라졌다.
맘씨 좋은 역장님은 사라지고 없지만, 대신 티켓 발권기 옆에 초속 5cm 성지순례객들을 위한 노트가 비치되어있다.
이런 시골 무인역까지 오래된 영화의 발자취를 더듬어 찾아온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지 않을까.
노트는 초속5cm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감상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을 들여가며 진득하게 읽고, 나도 한 줄 적고 왔다.
이 아릿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와후네역은, 아이러니하고도 현실적이게도 3부가 되어서야 다시 등장한다.
'이 이상 무엇을 잃어야 마음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엔딩곡의 가사를 곱씹게되는 장면이다.
신카이 감독의 신작이 공개되면 또 재개봉하지 않을까?
그때 챙겨보고 다시 맛보고싶다. 에스프레소와 카페라떼 맛이 동시에 나는 영화다.
JR 오야마역
도호쿠 본선, 쇼난신주쿠라인, 미토선, 료모선이 접속한다.
키타칸토 여행중 비교적 쉽게 들를 수 있는 성지.
JR 이와후네역
배차간격은 1시간에 1~2대 정도다. 마음 먹으면 갈 수 있을 정도?
2017년 2월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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