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하쿠레이 레이무]

 

부고 알림

 

모토오리 코스즈 님이 4월 23일 별세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빈소 : 망향회

 

발인 : 시립 승화원 (4/26)

 

 

 

  휴대전화 액정에 뜬 문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밤잠을 설친 정신이 점차 또렷해져 간다. 또 한 명 갔구나. 최초의 생각은 그러했다. 정형화된 문장으로 판때기에 송신된 메시지는 그만한 감상밖에 낳지 못한다. 고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이별의 감정이 격화되는 법이다. 기억하는 이가 이제 여남은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제지만.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밤사이 일어난 소식을 뉴스 어플로 찾아보고, SNS의 시시콜콜한 농담까지 확인한 뒤에야, 한숨을 내지으며 힘겹게 일어났다. 습관처럼 익숙한 몸짓으로 세수를 한 뒤, 창문 곁으로 비껴 설치한 베이지색 사이드 테이블에 앉아, 아침햇살을 받으며 묵묵히 귀리 시리얼을 먹는다. 스마트폰 거치대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잡학 팟캐스트의 잡음섞인 심심풀이 땅콩은 듣는둥 마는둥. 기계적인 아침을 해결하고, 설거지거리를 그대로 개수대에 방치한 채 시커먼 옷장에서 시커먼 양복을 꺼내 입는다. 그러고 나서 문자를 보낸 무녀에게 전화를 건다. 그럭저럭 글줄을 쓴다고 수필가라는 명함이 생긴 보람일까, 프리랜서 신세는 이럴 때 참 편리했다. 히에라르키 사회에 매일같이 굽실거리진 않아도 되니 말이다. 경조사를 통보할 회사도 없는 내게 아침은 언제나 느릿했다. 그리고 내 전화를 받을 무녀는 나보다 훨씬 느린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늙었다. 나와 다르게.

 

“여보세요.”

 

  통화 연결음이 다섯 번쯤 울린 뒤 무녀가 전화를 받았다.

 

“어, 문자 봤어. 아이고, 코스즈도 갔구나. 상심이 크겠네.”

 

“응, 모코우냐. 어젯밤에, 응. 그렇지. 잘 보내줘야지.”

 

  노인네의 훌쩍이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용건만 간단히, 라는 신조가 고개를 든다.

 

“그래, 아무튼 나도 그럼 지금 준비해서 사무소 쪽으로 갈게. 연락은 돌렸어? 다들 온대?”

 

“아이 뭐 그야 응, 문자 돌렸지. 여기 같은 동네 사는 사람들은 이미 와 있고, 도시에 있는 고향 친구들은 답장이 왔고. 그래. 너도 어여 와라.”

 

“알았어, 지금 출발하면 정오 지나서 한 4시쯤 도착할거야. 얼른 갈게. 끊는다.”

 

 

  터미널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화장을 고치고, 무뚝뚝한 기사의 배웅을 받은 뒤 터덜거리며 나가노행 티켓을 구매했다. 이윽고 고속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맨 앞 창가 자리. 엔진음과 차체의 진동과 진회색 살풍경을 제일 먼저 느끼는 자리에 앉아 출발을 기다린다. 수도고속도로 진입로로 향하는 적정 속도 속에서, 먼빛에 고향이 떠올라 몽롱해진다. 고향이 누구에게나 따뜻함으로 시작되어 그리움으로 완결되는 객체라면 얼마나 좋을까. 왼쪽 뺨을 한껏 유리창에 밀착시켜 차가운 기운을 억지로 빌리고, 상기된 가슴으로 추억에 깊이 잠긴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어 지금을 살아가는 생물에게 고향만큼은 변하지 않는 출발선으로 남아있곤 한다. 처음은 불변하다. 첫사랑, 첫키스, 첫경험. 첫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낱말은 저마다의 고유명사다. 깨어나 첫 울음을 터트리고 자라나 첫걸음을 내딛는 고향도 개개인에게 고유명사다. 처음에 대한 기억은 정답기도 하고 쓰라리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 그 기억들은 짧은 미련과 긴 상념을 남긴 채 그리움으로 끝난다. 우리는 그립기 때문에 처음을 추억하고 고향을 그린다. 개벽의 공간인 고향은 그렇게 자아를 자아낸다.

 

  망각은 감정의 대척점에 서있다. 세상에서 잊힌 것은 어떠한 상념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부르짖는 노학자에게도, 영영 산일된 사료의 행간을 읽어낼 재간은 없다.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살피고 추억하는 행위에서 어떠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까.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된서리를 맞으며, 망각의 끈적한 늪에 익사한 것들이 어디 한둘일까. 숫제 이백년 이상 시대정신은 과학에 대한 맹종과 어떤 집단의 경제 논리에 입각한 복리 실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검은 타르 늪구덩이 속에서 익사한 구태는 태반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불살라졌다. 화석조차 되지 못한 채 환상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기어져 생매장당했다. 환상. 새김은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숨쉬는 이들에게 붙이기에는 각박하고 가혹한 이름이다. 그런데 그 수렁 속에서 삶을 갈망한 헛것들이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헛것들만의 동산을 마련해 경계를 걸어잠그고 세상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그 땅을 환상향이라 불렀다.

 

  환상향은 처음부터 망각과 생존논리로 조소된 소도였다. 그 땅에 발붙여 사는 이들에게, 환상향은 고향과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헛것의 뜨락은 차츰 낙원이 되어갔다. 망각된 것들이 기억되는 실체를 배격함은 당연한 순리였다. 언제나 정합성을 추구하는 과학이 지배한 바깥의 이치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신산한 삶에 지친 몸뚱이를 뉘일 곳만이 필요했던 헛것들은, 바깥에서의 삶을 잊고 안쪽에 녹아들기를 서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상향은 온갖 미신적인 헛것의 낙원이자 제2의 고향으로 기능했다. 그렇게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바깥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이쪽 세계에서는 실존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 고로 존재할 수도 있었다. 세상이 완전히 붕괴하기 전까지는.

 

  신은 전지하고 전능하며 지선하냐는 물음이 던져졌을 때, 환상향의 원주민들은 단언코 아니라는 대답을 하기 마련이다. 고향땅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가던 신들은 약간 아둔하고, 어딘가 모자라며, 늘상 짓궂었다. 정말 불행히도,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경계의 관리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현자들이 연회의 분위기에 거나히 취해 불콰한 얼굴로 술잔을 건네던 때, 마침 무녀도 그 자리에 참석하여 다다미에 코를 박고 엎드려 골아떨어졌을 때, 세상은 붕괴하였다. 환상과 실체의 결계 사이에 난 자그마한 틈새 사이로, 바깥의 실존하는 무언가가 미친듯이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산더미만한 물이었다. 어느 신화에 묘사된 대홍수처럼, 온 고을을 파도가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수압은 경계를 열어젖히며 굉음과 함께 쏟아내려졌고, 결괴된 결계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종말론자들이 묘사하는 세상의 끝처럼 삽시간에 동산은 잠겨갔다. 헛것들의 존재를 위해 존재하던 인간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자맥질하다 거의가 축 늘어졌다. 헤엄을 치거나 비상할 줄 아는 자들만이 틈새 사이로 겨우 피신하여 생존하였다. 그 수효가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별안간에 불어닥친 물바다 속에서 수십 번을 죽고 나서 또다시 탄생한 나는, 겨우겨우 뭍에 닿아 깨어났다. 시리게 젖은 몸이 서럽고 또 놀라웠다. 비척거리는 발걸음 끝에 시야에 들어온 현수막, 그 위에 고딕체로 굵게 쓰인 문장은 참으로 맥빠지는 것이었다. ‘중부지방 최대의 저수량을 보유하는 나가노댐, 19년 만에 완공’. 우리의 고향은 그렇게 완전히 수몰되었다. 아마도 이백년도 더 전에. 어쩌면 19년 전에. 혹은 바로 그 날에.

 

  수몰되었으나 몰수되지 않은 것이 있다. 또 젖었지만 영영 멎지 않을 것이 있다. 바로 기억이다. 그 물난리 후, 세상에 걸맞지 않은 헛것들은 금세 스러져버렸다. 신앙을 잃은 신은 옷가지도 남기지 않은 채 승화하였고, 요괴들도 비슷한 전철을 밟으며 소멸하였다. 가까스로 이 세상에서의 합리성을 인정받은 인간들만이 마치 신에게 구원받은 선민처럼 살아남았다. 많은 것이 순식간에 바뀌었지만, 그들에게 사무치는 기억만은 형태를 유지한 채 그대로다. 바깥 세상이라는 틀에 우리는 우리를 직접 끼워맞추며 살아가야 했다. 산속에서 발견된 미개인 그룹. 나가노의 수수께끼 집단. 세태는 우리를 매몰찬 이름으로 불러댔다. 적응하지 못하고 이태 안에 자결한 자가 두어 명, 카미카쿠시를 당한 것처럼 자취를 감춘 자가 서너 명. 남은 자들은 국가시설에 수용되어 연구 대상이 되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가족은 있습니까?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 우리의 기억은 대개 인정받지 못했다. 실존할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고 세상의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실재하지 않는 창살은 환상향 원주민들을 옭아맸다. 이 사회의 비전향 장기수들은 약간의 보조금으로 나가노의 특색 없는 중소도시에 망향회라는 법인 건물을 세워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길 택했다. 개중에는 세상에 녹아들어 결혼하고 새로운 ‘처음’을 개척해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망향회에 내 이름을 올리지 않는 길을 택했다. 충분히 오래 살아 세상의 격변에 익숙한 인간이란 하늘 아래 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저들은 선분이고 나는 직선이다. 서글픈 운명을 미워하지도 않으며 나는 스스로 실종되었고, 보육 시설에 입소하여 나의 이름을 고쳤다. 내게 변화는 숙명이었고, 망향회에게 기억은 지침이었다.

 

 

 

 

“나 원 참, 관리인을 하나 뽑으라니까…….”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나서야 아슬아슬하게 약속한 시각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먼지낀 유리문이 맘에 들지 않는다. 여기는 구석구석 청소를 하여도 항상 퀴퀴한 곰팡내가 남아있다. 짧은 탄식을 내뱉고, 약간 비뚤어진 나무 현판을 고쳐 단다. 어느 시내의 오래된 거리, 도시만큼 낡은 잡거빌딩의 3층 한구석. 현판에는 제법 고풍스러운 글씨로 망향회 사무소라는 이름이 각자되어있다. 널조각에 패인 주름은 50년의 세월만큼 희치희치 늙었다. 어느 시대의 수몰지구, 소문처럼 사라진 환상향의 마지막 증거. 문 너머에서는 이미 노인이 된 원주민들의 부산스러운 수다가 느릿하게 들려온다. 나는 먼지를 털어내며 과거를 위한 공간에 발을 내딛었다.

 

“오, 모코우. 왔구나.”

 

  유리문에 달아놓은 청동색 풍경이 울리고, 무녀가 안락의자에 앉은 채 뒤돌아보며 눈인사를 건넨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인 그녀는, 어느새 호호할머니가 되어 날로 뒤쳐져간다. 사라진 공간을 기억하는 유일한 젊은이인 나는, 혈기가 왕성하다는 이유로 이 공동체의 간사 노릇을 하고있다. 뒤바뀐 처지가 처음에는 고까웠으나, 퇴조해가는 늙은이들의 마지막 사랑방지기 역할이 그리 힘든 것도 아니라 기꺼이 잡무를 도맡기로 했다. 어차피 저들은 죽는다. 망향회도 수년 내로 사라질 것이다. 수몰되어 푹 젖은 마을은 나의 기억에 간신히 의존하여 연명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다. 그때까지만, 오직 그때까지만 나는 이 어려운 추억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침전하리라.

 

“어, 코스즈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섞여 대답이 돌아온다. 사쿠야, 마리사, 아큐, 마을 사람들……. 오래 보아온만큼 반가운 목소리다.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친절한 인삿말들이 못내 슬프다.

 

“저기, 병풍 뒤에.”

 

  나는 가방을 탁자에 올려두고 병풍 뒤로 향했다. 얼기설기 짜인 목관 앞에서 짧게 합장을 하고, 하이얀 모시 수건에 덮인 코스즈의 얼굴을 들춰본다. 코와 입에 솜을 끼우고 곱게 누워있는 초로의 시신이 보인다. 내가 알던 책방의 개구쟁이 코스즈가 맞다. 또래였던 아이가 노환으로 죽는 일이 내게는 그리 특이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역시 죽음이 이 실향민들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내게도 가슴에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나만 빼고. 내가 죽지 못하는 비과학적인 사유가 통용되던 세상은 이제 없다. 그 세상을 기억하는 자들도, 이제 얼마 없다. 나는 묵도로 코스즈의 명복을 기원하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덮어주었다.

 

“사망 신고는 했어?”

 

“오늘 아침에 했어. 이제 장례가 문제인데……. 장례야 어차피 거의 우리들끼리만 하니까 괜찮다마는, 이 다 노인이니까 말이야……. 이번에도 상주를 좀 부탁하고 싶은데.”

 

“아이 뭐 상주야 내가 해야지. 빈소는 그냥 여기 사무실이고, 화장은 시 화장장에서 하고. 산골은 댐에 가서 해?”

 

“응 뭐 우리야 다 그렇지. 산골은 거기 댐에 가서 해야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재확인하는 대화가 흘러간다. 나는 능숙하게 삼베 완장을 차고, 상주의 예를 다한다. 찾아오는 이도 거의 없다. 책상과 의자를 전부 치우고 난 차가운 에폭시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문상객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노인들은 저마다 음식을 하거나 주변 정리를 하는 시늉을 하다가, 힘이 부치는지 이내 안방에 들어가 홑이불을 덮고 연속극을 보다 잠든다. 가끔씩 변소에 오가며 말동무나 해주면 감사할 지경이다. 문상객이라고는 흘러간 가십거리에 유달리 집착하는 기자들, 인심 좋은 이웃들, 사나에처럼 이 세상에서 가정을 꾸린 몇몇 원주민들의 가족과 유족들뿐. 예,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상투적인 언어가 단속적으로 오간다. 사람의 장례라기엔 참으로 단출하다. 어린 몸뚱이의 나는 휴대폰에 의지하여 단출하게 홀로 밤을 지새운다. 한기가 들어 밤이 차다. 생전에 코스즈와 퍽 친했던 아큐가 빈소를 지켜줘서 고맙다며 난방기구를 가져다준다. 아큐는 오늘 내내 허한 울상이다. 영정의 코스즈는 주름진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다.

 

 

 

 

  이틀이 지났다. 아침부터 우리는 덜컹거리는 시커먼 영구차에 실려 끌려간다. 시립 승화원이라는 화장장의 이름이 참 생각할수록 얄궂다. 무엇이 어떻게 변화하여 승화한다는 말인가. 이 실향민들의 넋은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예, 그럼 여기 사인해주시면 되고요. 그 혹시 상주께서는 고인이랑 어떤 관계가 되시는지요?”

 

  젊은 나와 늙은 일행을 보고 의아해하는 공무원의 악의 없는 질문이 가슴을 찌른다. 준비되어 있는 대답을, 굽실거리며 차분히 전달한다.

 

“아, 고인은 무연고자입니다.”

 

“무연고자요?”

 

“네, 무연고자 맞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화장하는 순서는 이제 번호로 저기 스크린에 뜰 거고요. 마지막으로 고인 얼굴 보시겠어요?”

 

  내 곁에 서있는 무연고자들의 눈빛을 살핀다. 레이무는 약간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그 뜻을 그대로 전한다.

 

“괜찮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화장에는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될 예정이고요. 다 끝나면 스크린 확인하시고 수골실로 오셔서…….”

 

  화씨 1,000도가 넘는 고온 고압의 불구덩이 속에서 코스즈의 육신이 으스러지고 한데 엉긴다. 소각된 시신은 뼛가루만 남긴 채 말끔히 사라진다. 정말 모조리 사라진다. 유일한 증거인 유골도 몇 시간 뒤면 검은 물속으로 잠겨갈 터이다. 화구에서는 희고 가느다란 연기가 길게 피어오른다.

 

  나는 그 연기를 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넨다. 앞으로 몇 번 더 이네들의 상주를 하게 될까. 언제쯤 이 사람들은 넋이라도 그들의 낙원으로 돌아갈까.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세상은 어디로 향해 갈까. 나는 진실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산골지로 향하는 승합차 안에 가득하다. 나는 휴대전화 액정에 뜬 오늘 날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곤한 정신에 잠시 눈을 붙이기로 결심했다.

 

 

 

 


 

제3회 글알못 팬픽 대회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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