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세기, 한반도의 삼국통일전쟁이 무르익으며 정세가 혼란해지자 한반도계 인물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는 일들이 잦아졌다.
이들을 도래인이라 하는데, 도래인은 벼농사 기술과 한자, 불교나 사원건축 기술 등 대륙의 선진문물을 일본에 가지고 가 고대 일본의 문화・정권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도래인과 그의 후손들은은 분명히 일본에 동화되어 지금 한반도에 살아가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으나
초기 도래인 집단이 거주했던 곳에 남긴 유산과 지명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예컨대 194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발간한 「조선의 국명과 관련한 명사고 朝鮮の国名に因める名詞考」에 일컫기를,
고구려계 도래인들이 남긴 지명으로 코마(高麗・居麻・貊・胡麻・居摩・駒・小間)와 코우라이(高来)를 들고 있는데, 코마와 코우라이는 고려(高麗)의 일본 발음이다.
신라는 더욱 다양해 ‘신라(新羅, 일본 발음 시라기)’에서 유래한 시라키(白木・白鬼・新座・之良岐), 시라야마(白山), 시라기(白城), 시라코(白子), 신라(信羅・新良)라는 명칭은 일본 전국의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이렇듯 도래인이 남긴 지명과 유산은 다대한데,
눈여겨 볼 것으로 동방성련선 2면 보스 타타라 코가사의 이름에도 쓰인 ‘타타라’라는 이름이 있다.
'타타라'는 다른 한반도국가 국명에서 유래한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한자 표기가 존재하는데
多田羅, 達良,多々羅, 多々良, 田多良, 多田良, 太田良, 田多羅, 夛々良 등이 대표적이다.
나가사키・후쿠오카, 도쿠시마, 야마구치・교토・군마 등 고대 일본 강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넓게 분포되어있는 타타라라는 이름의 유래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먼저 고대 한국에서 훗날 백제를 거쳐 신라로 흡수되었던 가야 제국의 한 나라인 ‘다라국 (多羅國)’에서 왔다는 설이 있는데, 다라국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에 존재하는 다라리(多羅里) 일대에 존재했다고 비정된다.
두 번째 설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는 백제 성왕(聖王)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琳聖太子)가 일본으로 도래해서 쇼토쿠 태자를 만나 타타라(多々良)라는 성을 받아 그로 인해 유래했다는 것이다.
타타라 씨족은 후에 대호족으로 성장해 칸사이 지방을 주무르는 오우치(大内) 씨족이 되는데, 대영주가 된 이후에도 백제 왕실의 후손을 자처하며 조선 왕조와 폭넓게 교류했다.
오우치 씨족과 임성태자, 타타라의 관계를 서술하는 대표적인 한국 사료로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운부군옥이 있다.
원문
日本國 大內殿使者有榮呈書于禮曹曰: "多多良氏入日本國, 其故則日本曾大連等起兵, 欲滅佛法, 我國王子聖德太子崇敬佛法, 故交戰。 此時百濟國王勑太子琳聖討大連等, 琳聖則大內公也。 以故聖德太子賞其功而賜州郡, 爾來稱都居之地, 號大內公朝鮮。 今有大內裔種否定, 有耆老博洽君子, 詳其譜系也。 大連等起兵時, 日本國 鏡當四年也, 當隋 開皇元年也。 自鏡當四年至景泰四年, 凡八百七十三年, 貴國必有琳聖太子入日本之記也。 大內公食邑之地, 世因兵火而失本記矣。 今所記, 則我邦之遺老口述相傳而已。
한국어 번역
일본국 오우치씨(大內)의 사자 요시히로(有榮)가 예조에 글을 올리기를,
다다량씨(多多良氏, 타타라씨)가 일본국에 들어갔는데
그 까닭은 일본에서 일찍이 오오무라지(大連, 모노노베씨족을 의미한다) 등이 군사를 일으켜 불법(佛法)을 멸하고자 하였고,
우리 나라 왕자 성덕 태자(聖德太子)는 불법(佛法)을 높히고 공경하였기 때문에 교전하였으므로 이때 백제국왕이 태자 임성(琳聖)에게 명하여
오오무라지 등을 치게 하였는데, 즉 임성은 오우치 공(오우치 씨족의 시조)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덕 태자께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서 주군을 하사한 이래로 그 거주하는 땅은 오우치 조선(大內公朝鮮)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오우치 후손의 부정이 있지만 늙은이 가운데 박식하고 통달한 군자가 있어서 그 계보가 상세합니다.
오오무라지 등이 군사를 일으킨 때가 일본국 경당(鏡當) 4년인데 수나라 개황(開皇) 원년(581년)에 해당하니,
경당 4년에서 경태(景泰) 4년(1453년, 단종 원년) 까지가 모두 873년입니다.
귀국(貴國)에는 반드시 임성 태자(琳聖太子)가 일본에 들어간 기록(記錄)이 있을 것입니다.
오우치 식읍의 땅은 대대로 병화로 인하여 본기를 잃어버리었고, 지금 기록한 것은 우리 나라의 남은 늙은이들이 구술로써 서로 전하여 왔을 뿐입니다.
단종실록에 기록된 오우치의 사자 요시히로의 말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다다량씨라는 성을 내걸고 성왕의 명령으로 척불파를 척결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성덕태자는 임성태자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땅을 하사했고, 임성태자는 일본에 눌러앉아 '오우치'라는 성을 창성해 유력 호족으로 살았다.
이렇게 단종대에 본인의 시조가 타타라씨이자 임성태자라고 자처하는 이가 입조하여 본인이 백제의 후손인 것은 확실한데 그 증거가 없으니 찾아달라는 요청을 한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원문
多多良
百濟溫祚遠孫某入日本泊于
浦因以為姓世號大内殿 以系出百濟 最親我國
한국어 번역
다다량(타타라)
백제 온조의 먼 후손, 아무개가 일본에 건너갔다.
포구의 이름을 따 성을 만들어 본인을 오우치(大内)라 불렀다.
그러므로 백제계 성씨이며 우리나라와 매우 가까운 사이다.
이후 조선 선조대에 만들어진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의 기술에 따르면, 조선의 유식자들은 다다량을 백제계 인물로 인식하며, 오우치 가문과의 연관성까지 주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설은 부산의 유명한 포구인 ‘다대포’에서 왔다는 것인데
부산시 사하구 홈페이지의 동명유래에 따르면 다대포라는 지명은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5년조에 나오는 다대라원(多大羅原), 추고기(推古記)에 나오는 다다라(多多羅) 등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큰 포구가 많은 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신라의 유명한 재상 박제상에 관한 일본 기록에서도 다대포를 찾을 수 있다.
일본서기는 사실의 진위가 의심되는 편향적 사서이지만, 다대포는 역사시대 초기부터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한일통상외교의 주요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대포가 언급된 일본서기의 주요 구절 원문 / 한국어 번역
스이코 천황 9년조
新羅王、惶之舉白旗、到于將軍之麾下而立。割多々羅・素奈羅・弗知鬼・委陀・南加羅・阿羅々六城以請服
신라왕이 매우 두려워하며, 백기를 내걸고, 일본 장군기 아래에 와 서있었다. 다다라, 소나라, 불지귀, 위타, 남가라, 아라라 등 6개의 성을 할양하고, 종복하겠다며 청원했다.
케이타이 천황 23년조
上臣抄掠四村、金官・背伐・安多・委陀、是爲四村。一本云、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爲四村也。盡將人物、入其本国。或曰「多々羅等四村之所掠者、毛野臣之過也。
신라의 대신은 마을 네 곳을 습격해 약탈했다. 그 마을은 금관, 배벌, 안다, 위타였다.
어느 책에서 말하기를 다다라・소나라・화다・비지라고 한다.
어떤 이가 말하길 '다다라의 네 마을을 습격한 건 신라의 잘못이다'라 평했다.
신공황후 섭정 5년조
共到對馬宿于鉏海水門、時新羅使者毛麻利叱智等、竊分船及水手、載微叱旱岐、令逃於新羅。乃造蒭靈、置微叱許智之床、詳爲病者、告襲津彦曰「微叱許智、忽病之將死。」襲津彦、使人令看病者、既知欺而捉新羅使者三人、納檻中以火焚而殺。乃詣新羅、次于蹈鞴津、拔草羅城還之。
(눌지 마립간의 동생 미사흔을 구출하러 온 박제상은 일본의 장군 소츠히코와 함께)
대마도 북방의 해안가에서 숙박했다.
그 때, 신라에서 온 사자 모마리질지(박제상)은 몰래 배와 노 젓는 사람을 구해 미사흔을 태우고 신라로 도망치게 했다.
풀로 만든 인형을 미사흔의 침대에 눕히고 병에 걸린 것 처럼 보이게 해 소츠히코에게 말했다.
'미사흔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소츠히코는 사람을 시켜 간병하게 했지만 속아넘어갔다는 걸 알고 신라에서 온 사자 세 명을 전부 투옥시키고 화형해 죽였다.
그 뒤 신라에 도착해, 도비진(다대포)에 머물며 초라성(경상남도 양산)을 함락시키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했다.
여기서 눈여겨보고 싶은 지명은 도비진(蹈鞴津, 일본 발음은 '타타라노츠')이다.
도비는 풀무를 뜻하고, 풀무는 일본에서 타타라라 읽는다.
일본에는 철의 원재료가 되는 철광석은 부족했지만, 화산이 많은 이유로 질 좋은 사철을 대량으로 채굴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사철을 녹여 철괴를 생산하는 특수한 제철 기술이 발달하였는데, 이를 타타라 제철(蹈鞴製鉄)이라 한다.
초기 타타라 제철은 풀무를 밟아 가마에 공기를 불어 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런 이유로 ‘타타라’는 일본에서 풀무를 뜻하는 예스러운 말이기도 하다.
일본에 풀무를 사용한 제철법이 도입된 것은 6세기 중반으로
마침 바다 건너의 가야가 멸망할 시기였으므로 가야계 유이민들이 제철기술을 가지고 갔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풀무 나루 蹈鞴津'라 불린 다대포(일본명 타타라)가 일본인들에게 제철 기술을 건네준 포구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일본의 고대 제철관련 유적은 한반도와 마주하고 있는 북큐슈 지방에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타타라'라는 단어가 문헌기록만을 토대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고 확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窪田蔵郎씨는 『철로 읽어내는 일본의 역사 鉄から読む日本の歴史)』에서 타타라는 맹렬한 불길을 뜻하는 타타르어 Тата Тор에서 왔다고 주장했으며
安田徳太郎씨는 『일본어의 조상 日本語の祖先 』에서 산스크리트어로 타타라는 불을 뜻하므로, 인도에서 온 말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타타라 제철 공법은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무역이 일본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기 이전, 도래인들을 통한 문화 교섭기에 전파되었으므로 위의 설 또한 전적으로 신뢰하긴 어렵다.
코가사의 모티브가 된 요괴인 카라카사오바케(から傘おばけ)는 외눈박이 우산에 다리 한 짝이 달려 뛰어다닌다고 일반적으로 묘사되는데
다리가 하나인 것에서 착안해 흔히 잇폰아시(一本足)라 총칭되기도 한다.
외눈박이에 다리가 하나인 요괴로 잇폰다타라(一本だたら)라는 요괴도 있는데,
이 요괴 또한 잇폰아시라고도 불려 카라카사오바케와 잇폰다타라는 민속학적으로 크게 구별되지 않고 비슷한 요괴로 여겨진다.
이 잇폰다타라(≥카라카사오바케)의 ‘타타라’는 상술한 타타라 제철에서 유래한 것으로, 제철 중에 발생하는 강렬한 빛을 바라보다 보면 한쪽 눈을 실명하거나, 풀무를 발로 밟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는 등의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잇폰다타라와 카라카사오바케의 전승이 남아있는 마을에는 제철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고로 타타라 코가사의 한쪽 눈이 오드아이인건 추측하건대 원본 요괴인 잇폰다타라처럼 실명한 걸 표현하고 싶었던 신주가 오드아이로 퉁친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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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 추기
중요한 사실을 안 적었는데, 일본신화에 등장하는 대장장이 신의 이름은 '아메노마히토츠노카미 天目一箇神'
目一이란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외눈박이 신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키클롭스도 대장장이 신이자 외눈박이인데, 역시 실명은 대장장이의 직업병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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