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고지 입구

간고지(元興寺), 우리말로 원흥사. 정겨운 이름을 지닌 간고지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나라의 명찰이다.

일본 최초의 불교사원을 계승한 사찰로,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1998년 세계유산으로 당당히 지정되었고,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의 발을 끌어모으고 있다.

 

참배료는 대인 600엔(2017년 기준)

 

매표소 앞, 간고지 안내문

간고지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안내문 사진이다.

 

매표소 앞, 간고지 극락당 기와 사진

안내문 바로 옆엔 극락당 백제 기와 사진이 놓여있는데, 한국과의 연을 깊이 느끼게 한다.

 

 

간고지 창건 이야기를, 동방과의 연관성도 알기 쉽도록 좀 더 풀어 써보자.

 

소가노 우마코 그림

6세기 전반 어느날, 킨메이 천황(欽明天皇)은 대신들에게 「서쪽의 나라(백제)가 보내준 불상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답다. 지금껏 보지 못한 아름다움인데, 과연 이를 숭배해야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숭배해야 한다고 주청한 이가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 반대론을 펼친게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였다.

 

"숭불논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논쟁은, 표면적으론 불교 신앙에 대한 논쟁이었으나 정권을 잡기 위한 암투이기도 했다.

 

당시 동아시아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통일전쟁과 중국이 얽힌 긴장 상태에 놓여있었으며, 야마토 정권의 외교 책임자였던 소가씨는 최첨단 문화였던 불교를 공인하는 것으로 대내외로 일본의 힘을 과시하려고 했으며, 모노노베씨는 소가씨의 힘이 불교를 등에 업고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불교 공인에 반대했다.

 

587년, 소가씨와 모노노베씨가 불교 수용을 놓고 전투를 벌이는데, 이를 정미의 난(丁未の乱)이라 한다.

정미의 난에서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는 소가씨의 편에서 싸웠으며, 하타노 카와카츠(秦河勝) 또한 쇼토쿠 태자를 도왔다고 기록되어있다.

전투는 소가씨의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에 불교가 수용되고 모노노베씨는 사실상 멸족당한다.

 

아스카데라 복원도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는 소가씨의 본거지였던 아스카에 아스카데라(飛鳥寺)라는 일본 최초의 사찰을 건립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88년(백제 위덕왕 35)에 우마코의 요청에 따라, 백제는 승려 혜총(惠總)을 비롯하여 사공(寺工) 태량미태(太良未太) · 문고고자(文賈古子), 노반박사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 마나문노(麻奈文奴) · 양귀문(陽貴文) · 능귀문(倰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 화공(畫工) 백가(白加) 등을 파견하였다.

 

여기서 사공은 절을 짓는 사람을 뜻하고, 노반박사는 불탑 기술자, 와박사는 기와장이를 뜻한다.

 

극락당 기와 모습

헤이안 시대에 접어들어 일본의 수도가 나라로 천도함에 따라 아스카데라도 수도로 이전하게 되는데, 그렇게 아스카데라를 계승한 사찰이 간고지다. 

아스카데라는 폐허가 되었으므로 그들이 남긴 유산을 오롯이 찾아볼 수는 없지만, 간고지의 극락당과 선실 지붕에 쓰인 아스카시대의 기와들은 백제 와박사들이 만든 기와라 여겨진다.

 

실제로 가보면 정면에서는 기와의 색깔을 비교하기 힘들고, 건물의 측면으로 가야 기와가 잘 보이는데

적색・흑색 계열의 기와들이 백제 기와라고 한다.

 

미코의 스펠카드 소환 「호족난무」

 

말할 것도 없이 숭불논쟁은 동방신령묘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소가씨는 소가노 토지코, 모노노베씨는 모노노베노 후토, 쇼토쿠 태자는 토요사토미미노 미코, 하타노 카와카츠는 하타노 코코로의 캐릭터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간고지 극락당,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아직 움집에 살고 있던 시대에, 주춧돌 위에 거대한 기둥이 올라서고, 기와를 깐 중후한 지붕을 갖춘 본격적인 사찰이 등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는 불교 문화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간고지 극락당. 내부도 관람 가능하나 사진 촬영은 불가

간고지는 이전 이후로도 황실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해나갔다.

헤이안시대에 수도 헤이죠쿄(平城京) 주변에서 조정의 지원을 받던 일곱 개의 대사찰이 있어 이를 남도 칠대사(南都七大寺)라 부르는데, 간고지는 토다이지(東大寺)・고후쿠지(興福寺)・호류지(法隆寺) 등과 함께 당당히 칠대사로서 어깨를 나란히했다. 

 

그러나 헤이안시대에 접어든 뒤 진언종과 천태종, 그리고 밀교가 일어나 일본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헤이안시대 말기엔 조정의 권력도 약해져 간고지는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간고지 부도전(浮屠田)

하지만 나라의 서민들은 간고지를 잊지 않았고

서민들이 숭배하는 지장 신앙・쇼토쿠 태자 신앙 등을 받아들여 중세 이후에는 서민들의 절로 다시 부흥하였다.

 

경내의 수많은 지장보살상과 석물들은 중세 간고지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부도전, 극락전, 선실

그러나 무로마치시대에 일어난 민란으로 금당이 소실되고, 전국시대부터 에도시대를 거치며 경내에는 민가들이 조금씩 들어서는 등 간고지는 다시 쇠락했다.

급기야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폐불훼석의 바람이 불어 간고지는 사찰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학교로 쓰이다, 2차대전이 발발한 뒤에는 주지승도 없는 버려진 절이 되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모금으로 2차대전 종전 후 간고지는 재건되었고, 1970년 복원 공사를 마쳐 지금의 모습에 이른다고 한다.

 

가고지의 오니의 모습

 

간고지에는 사찰답지 않게 오니와 관련한 전승도 남아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쇼토쿠 태자가 살아있던 때에, 어느 농부가 뇌신과 맞닥뜨렸다고 한다.

번개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진 뇌신은 즉시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신했는데, 농부가 기이하게 여겨 뇌신을 죽이려고 하자 뇌신은 목숨을 구걸하며 나처럼 강력한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농부는 그 말을 받아들여 통나무 배를 만들어줬는데, 뇌신은 농부가 보는 앞에서 배에 올라타 구름과 번개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얼마 뒤, 농부의 아내가 뇌신이 점지해준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머리가 뱀과 같고 꼬리가 길게 늘어진 이상한 모습이었는데, 뇌신이 말한 대로 힘이 아주 셌다고 한다.

아이는 성장해서 간고지에 들어가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간고지의 동자승들이 종루 밑에서 매일밤 죽어나가는 사건이 터져 오니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는 자신이 오니를 죽이겠다고 말하며 종루에 몰래 숨어있었는데, 오니에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하고 그 피를 아침에 따라가보니 예전에 간고지에서 일하던 이름 없는 남자의 묘에 다다랐다고 한다.

그 남자의 사령이 오니가 되어 나타난 것이라 여겨, 제사를 지내 성불을 시켜주었다고 한다.

이후에 아이도 오니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득도해 법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간고지에 나타난 오니는 간고지를 뜻하는 元興寺라 쓰고 가고제, 가고우지, 구와고제, 간고, 간고우 등으로 불렸으며 그냥 '간고지의 오니'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이도 오니가 되었다는 설에선 두 오니를 똑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즉, 아이와 사령을 동일시한다는 뜻.


 

토지코의 스펠, 뇌시「가고우지 토네이도」

이 이야기는 신령묘 소가노 토지코의 스펠카드 뇌시「가고우지 토네이도」의 모티브가 되었다.

 

떨어지는 벼락과 같은 모습, 가고우지가 뇌신의 자식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주는 스펠카드일까?

그렇다면 간고지->가고우지->소가씨의 사찰->소가노 토지코->가고우지 토네이도.. 라는 모티브 연결고리가 성립한다.

 

이에 대한 또다른 해답은 신령묘 오버드라이브에서 찾을 수 있다.

 

소가씨는 숭불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오랜 기간 일본의 권력집단으로 군림했는데,

이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을사의 변(乙巳の変)이었다.

 

에도시대에 그려진 을사의 변 묘사 그림

권신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는 쇼토쿠 태자 계열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에 반대하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가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 皇子)와 손을 잡고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소가씨는 급격히 쇠락하고, 후지와라 씨가 유력 호족으로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이를 을사의 변이라 하며, 일본에는 급격한 정치 개혁이 일어나 다이카 개신으로 이어진다.

황자는 이후 천황이 되며, 카마타리에게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하사해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鎌足)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또 당연한 이야기지만 후지와라노 카마타리는 후지와라노 모코우의 먼 조상뻘...

 

 

원령「이루카의 벼락」

오버드라이브에서는 토지코의 스펠카드명이 원령「이루카의 벼락」으로 바뀌어 나온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한 후지와라노 카마타리의 저택에 번개가 떨어졌는데, 이후 카마타리가 급격히 초췌해지며 죽고 만다.

이를 당시 사람들은 이루카의 저주가 내렸다고 두려워했는데, 크게 제사를 베푼 뒤에야 저주가 풀렸다는 말이 있다.

 

즉, 오니 가고우지만 염두에 둔게 아니라 소가씨에도 번개와 관련된 설화가 있었다는 이야기.

상당히 짜임새있는 스토리텔링을 지닌 스펠카드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뭐 굳이 동방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을 고찰

 

고즈넉한 분위기에 아기자기한 마당이 있고, 또 이야기가 많아 들를만한 성지순례 포인트.

나라의 유명 관광지인 사슴 공원과도 가까워 들르기 쉽다.

 

다음에 갈 기회가 있다면 단풍이 들었을 때 가보고싶다.

 

 

 

주소

奈良県奈良市中院町11番地

나라현 나라시 츄인정 11번지

 

가는 방법

나라역 하차 도보 15분

긴테츠 나라역 하차 도보 12분

 

 

2017.11.05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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