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코시 풍경

효고현 아코시 사코시 (赤穂市 坂越)에는 하타노 코코로의 성지 오오사케 신사가 있다.

 

사코시는 사진에서 보이듯 한적한 어촌이지만

일본 도시경관 100선에 선정된 바 있으며 오오사케 신사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적과 전승이 남아있어

천천히 둘러보기 좋은 마을이다.

 

오오사케 신사 토리이

오오사케 신사에서는 하타노 카와카츠(秦河勝)라는 인물을 모신다.
하타노 카와카츠는 한반도계 도래인으로, 쇼토쿠 태자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 가면극인 노가쿠(能楽)를 창시했다고 한다.

 

신사 입구에 있는 안내판


안내판 내용 번역

 

 

하타노 카와카츠 전설이 서린 땅, 사코시


카와카츠는 긴메이・비다츠・요메이・스슌・스이코・쇼토쿠 태자를 모셨다고 한다. 그는 그의 사루가쿠와 노가쿠를 자손에게 전한 뒤 (신으로 변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남들 눈을 피해  셋츠국 나니와의 포구에서 나무배에 올라타 바람을 따라 서해로 나아갔다. 그 배는 하리마국 사코시 포구에 표착했다.  해변가 사람들이 배를 뭍으로 끌어올리니 안에 타고 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과는 달랐으며, 다른 이들에게 빙의하며 기적을 행했다고 한다. 사람들을 그를 두려워해 신으로 숭배했으며, 나라는 부강해졌다고 한다. 사나운 신이었기 때문에 '아주 사납다(大荒)'란 단어를 써 대황대명신(大荒大明神)이라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그 영험함이 이어진다. 쇼토쿠 태자가 반란자 모리야(守屋)를 진압할 때에도 카와카츠의 신통력을 빌렸다고 한다.

(제아미 世阿弥 『풍자화전 風姿花伝』에서) 

 

■ 하타노 카와카츠

  하타씨(秦氏)는 백제에서 도래한 궁월군(弓月君)을 시조로 하여, 토목, 양잠, 기직 등의 기술을 발휘하여 크게 번창한 고대 씨족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타노 카와카츠는, 아스카 시대 전반(6세기 말 ~ 7세기 중반)에 쇼토쿠 태자를 모시며 야마시로국 우즈마사(현재의 교토시 우쿄구 우즈마사 太秦)에 코류지를 창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오사케 신사의 기록에 따르면, 하타노 카와카츠는 쇼토쿠 태자 사후 고쿄쿠 3년(644년) 9월 12일에,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난을 피해 해로로 사코시에 표착해, 주변을 개척해 풍요롭게 한 뒤 죽었다고 합니다. 사코시만에 떠있는 이키시마(生島, 천연기념물 지정)에는 하타노 카와카츠의 묘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 오오사케 신사

  이키시마를 금족지로 하여, 섬 안에 제례 시설을 갖춘 오오사케 신사는 오오사케 대명신(하타노 카와카츠)를 모시는 신사로, 1182년 이미 유력한 신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 아코군(지금의 아코시, 아이오이시, 카미고오리정)에는 오오사케 대명신을 모시는 신사가 28사 이상 있었다고 하며, 고대부터 아코군과 하타씨는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고대 문헌이 증명합니다.

  오오사케 신사의 제례는, 하타노 카와카츠가 사코시에 표착한 날을 제례일로 해서 시작했으며, 「사코시의 뱃놀이 坂越の船祭」(국가 중요 무형 민속문화재)는, 세토내해 3대 뱃놀이로 유명합니다.


 

현사 오오사케 신사

이렇듯 오오사케 신사는 하타노 카와카츠를 모시는 중요한 신사로, 예전부터 그 사격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에 얽힌 전승과 소개할 이야기거리도 많은데, 먼저 안내판에도 쓰여있는 '백제계 도래인'이라는 구절의 신빙성부터 다뤄보자.

 

배전으로 향하는 계단

하타씨는 본디 일본어로 모두 같은 발음인 파다(波多), 파대(波大), 파단(波旦) 반태(半太) 등으로 표기했었다. 지금은 하타(秦)나 하타(波多) 하타(羽田)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진 14년(283년) 궁월군(弓月君, 유즈키노기미)라는 인물이 백제를 거쳐 일본에 귀화했는데, 자신을 진시황의 후예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거짓임을 바로 알 수 있는데, 진시황의 본명은 영정(嬴政) 또는 조정(趙政)으로, 秦씨를 칭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나라가 존재했던 BC 200년대와 AD 200년대는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확대해석을 해도 한반도로 이주한 전진(前秦) 또는 후진(後秦) 사람이 다시 일본으로 도래해 秦人임을 칭했을 가능성까진 고려할 수 있으나, 시황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하타씨가 일본에 정착한 것은 5세기 후반 무렵으로, 볍씨를 가지고 온 하타씨는 저수지와 수로를 만드는 관개 농업을 시작하였고, 우수한 토목기술을 갖고 토지를 개발하여 대호족이 되었다.

이 하타씨가 백제계 인물이냐, 신라계 인물이냐, 혹은 제3국에서 온 인물이냐를 가리는 논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일본에선 백제계, 한국에선 신라계 인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국보 제 242호

 

신라 법흥왕기인 522년에 세워진 울진 봉평 신라비의 비문에서 파단(波旦)이라는 지명이 발견되는데, 이는 하타씨의 이표기인 波旦과 일치한다. 일전에 올린 연구글에서도 말했듯이, 도래인들은 고향의 지명이나 국명을 따와 창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선 하타씨의 본향을 울진으로 추정한다.

또한, 하타노 카와카츠는 신라 계통의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는데, 이는 소가씨와 아야씨(漢氏)가 백제 계통의 불교를 신봉하던 것과 대조적이다. [平野邦雄「秦氏の研究」]

따라서 한국에선 하타씨를 신라계 인물로 여기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반면, 일본에는 「궁월 弓月」을 향찰식으로 읽은 '궁달'과, 백제의 일본 발음인 '쿠다라'가 동음・동의인 점을 들어 「궁월군 弓月君」=「백제군 百済君」이라 해석하는 학설이 있다. (君은 인명에 붙는 경칭)

또한 일본서기에 궁월군이 백제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도래했다는 부분을 들어, 백제계 인물로 여기곤 한다.

 

 

좌측은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우측은 코류지 소장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나는 개인적으로 신라계 인물이라는 해석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선, 긴말 할 것도 없이 봉평 신라비라는 1차사료로 波旦이라는 표기가 교차검증 가능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또한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생각해봤을 때 왜와 백제는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신라를 향한 왜의 공격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으로 도래한 울진의 지방호족이 신변 보호를 위해 자신을 백제계 인물이라 속였거나, 신라계를 표방했으나 일본 조정 측에서 백제와의 관계 & 내부 사정을 고려하여 고의로 백제계라 기록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이유는, 하타노 카와카츠가 건립한 코류지(広隆寺)의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조각 국보 1호)을 보면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 83호)과 외양과 양식이 매우 흡사한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는 신라에서 제작했다는 설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코류지의 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하타노 카와카츠가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이라 적혀있기 때문이다.

 

뭐 일본에 동화된지 오래였을 하타씨가 백제계이든 신라계이든 코코로가 한국인 캐릭터가 되는건 아니지만,

흥미로운 주제다.

 

배전 정면 모습

 

 

또 하나 재미있는 학설로, 하타노 카와카츠는 사실 경교도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교란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를 의미하는데, 7세기무렵 당나라에 전파되어 크게 유행했으며, 이슬람 제국이 팽창할 때까지 동아시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타씨가 경교도라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이 오호십육국 시대의 국가 후진(後秦) 출신의 유민, 또는 실크로드를 타고 일본까지 들어온 유대인이라 본다.

 

하타씨를 경교도라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카이노코야시로, 세 기둥 토리이

양잠기술을 가져온 하타씨가 직접 세운 카이노코야시로(蚕の社, 누에 신사라는 뜻)에는

일본 전국적으로도 고대에 세워진 전례가 없는 세 기둥 토리이(三柱鳥居)가 서 있는데

이게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확실히 특이한 모양이기 때문에 그 유래가 분분하다.

 

이 카이노코야시로를 비롯해 코류지 등을 세우며 하타 씨가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은 태진, 우즈마사(太秦)라 불리는데

고대 동아시아에서 로마를 부르던 명칭이 대진(大秦)으로 매우 비슷하다.

로마가 그리스도교의 주요 성지 중 하나인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배전 내부 모습

또, 하타노 카와카츠를 모시는 오오사케 신사(大避神社)는 본디 비슷한 한자인 大闢神社(대벽신사)라 적었다.

 

이 대벽은 이스라엘 국왕인 다윗(David)의 음차자이다.

현재 표기법인 大避의 의미가 한국어로 직역하면 '크게 피하다'로, 그 어원이 불명인 점에서 다윗에서 따온 게 맞다는 설이 있다.

즉, 오오사케 신사는 원래 그리스도교의 다윗을 모시던 신사라는 학설.

 

일본의 유명 역사소설가인 대문호 시바 료타로가 해당 설에 대해 긍정하며 큰 반향이 일었다.

 

배전에 딸린 에마전 모습

이런저런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어쨌든 둘러보기에 참 좋은 신사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고 온지라 퍽 힘들어 배전 의자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데 바람이 불어 시원하고 쉬기 좋았다.

 

 

가장 중요한, 하타노 카와카츠와 하타노 코코로의 연관성에 대해서.

하타노 카와카츠는 전술했듯 쇼토쿠 태자의 명령으로 가면극인 노가쿠를 창시했으며, 그때 사용하는 66종의 가면들도 손수 만들었다고 한다.

 

그 가면에 혼이 깃들어 생긴 츠쿠모가미를 멘레이키(面霊気)라 하는데,

토리야마 세키엔(鳥山石燕, 1712 ~ 1788)이 '하타노 카와카츠의 가면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건 가면에 혼이 깃들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고안해낸 요괴라고 한다.

 

'하타노 코코로 秦こころ'는 멘레이키로, 동방에 등장하는 코코로는 노가쿠에 사용되는 가면들을 착용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배전에는 이렇듯 노가쿠에 사용되는 가면 그림들이 봉납되어 있으며, 개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후나에마

후나에마(船絵馬)란 해상안전을 기원하며 선주나 선장이 절이나 신사에 봉납한 에마를 뜻하는데,

사진의 후나에마는 1722년에 봉납된 것으로 후나에마 중에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항구마을로 번창한 사코시와 오오사케 신사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드문 신사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동네 주민분께서 날 붙잡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하니 한국과 깊은 연관이 있는 신사인데도, 여기 몇십년을 살며 한국인이 온 건 처음 본다며

반갑게 맞이해주시며 어디 가서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신문 앞에서 바라본 이키시마

사실 마을에선 신사만큼 신사 앞바다에 떠있는, 카와카츠가 묻힌 이키시마(生島)를 중시하는데

금족지로 묶여있기 때문에 평소엔 못 들어가고,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낼 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2년 전에 제사를 지낼 때 직접 들어가보니 섬 해안가에 쓰레기들이 엄청 많아서 확실히 카와카츠가 해류타고 온게 맞긴 맞나보네 하셨다고.

 

이키시마 모습. 1년에 단 하루를 제외하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또 배에서 남정네들이 항해하다보면 부족한게 야채랑 여자인데

카와카츠의 신하 둘이 부추를 가지고 싸우다가 바다에 떨어져서 죽었기 때문에 제삿상엔 꼭 부추를 올린다고 했고

표착 직후엔 사코시 옆동네인 미사키(御崎)가 일본 기생인 게이샤의 발상지 중 하나인데, 도망가지 못하도록 섬에 틀어박혀 게이샤를 들인 뒤 몇날 며칠이고 성욕을 풀었다고 한다;;

 

만약 이 전승이 사실이라면 하타노 카와카츠를

'사나운 신이었기 때문에 '아주 사납다(大荒)'란 단어를 써 대황대명신(大荒大明神)이라 하였으며...'라는 문헌기록은 여기서 기인한게 아닐까?

 

인터넷이나 책으론 알 수 없는, 구전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당시 내게 친절히 마을과 신사를 소개해주신 아저씨. 이키시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셔서 찍었다. 

여행이 이래서 즐겁다.

정말 흥미롭고 즐거웠던 성지순례처

 

 

 

 

 

 

주소

兵庫県赤穂市坂越1299

효고현 아코시 사코시 1299

 

가는 방법

JR 아코선 사코시역 하차 후 도보 20분

 

 

 

2017.09.19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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