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간 다녀온 히로시마 여행, 청춘18티켓을 이용해 산요 본선 완행열차를 타고 느릿느릿하게 다녀왔다.
어딜 가겠다는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날그날 갈 곳을 정했지만, 그게 청춘18티켓의 묘미가 아닐까.
빨리빨리 여행을 할거면 신칸센, 비행기를 타면 된다.
이하 사진과 간략한 설명문만!
1일차
니시와키로 가는 디젤차니시와키 동네 이나리 신사발에 붕대(?)를 감은 이나리 여우상차고에 건어물을 말리고있는 풍경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카코가와선의 작은 간이역. 주인 없는 자전거가 서있었다.역사 내부 모습열차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올까 말까 한다신니시와키역 역명판. 하루 이용객은 7명이라고 한다. 가장 많았던 2000년조차도 13명.단선 플랫폼목공예점이었을까?
사코시역 역사. 16시 30분 열차를 타고 히로시마로 향했다. 10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히로시마역. 보통열차 장거리 이동은 시간과의 싸움이다.히로시마역 구내공사중이었던 남쪽 출구
쫄쫄 굶었던 터라 히로시마 명물이라던 츠케멘을 오오모리로 시켜먹고 호텔에 들어가 디비잤다.
2일차
아침 일찍 나와 시내를 둘러본다. 메이지 시대의 건물을 배경으로 현대적인 트램이 지나가는게 이색적이다.원폭 평화공원으로 향하는 다리원폭 평화기념 자료관내부 상설전시, 촬영 가능이었다. 피폭 전의 히로시마전쟁 전 히로시마의 영화를 전해주는 사진원자폭탄 투하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히로시마코로나가 한창이었지만 가족 단위로 보이는 관광객들이 다수 있었다.작품명 「작열의 순간」 1945. 8. 6. 후지미쵸 폭심지에서 1km. '8월 6일의 기억'. 당시 18세.'살려줘' '물을 주세요' 움직일 힘도 없는 어미의 가슴팍에 매달리는 젖먹이.' 눈을 떠, 눈을 떠보렴'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반쯤 미쳐가는 엄마.'그야말로 지옥이었다.'당시를 증언하는 사진들, 그림들.사람이 앉아있던 자리를 제외하고 하얗게 변색된, '그림자의 돌'원폭은, 국적이나 민족을 구별하지 않고, 온갖 사람들을 덮쳤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한반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중략). 그 중에는, 징병이나 징용을 당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곽기훈 씨는 전주사범학교 재적 중 1944년 징병으로 히로시마의 부대에 배속. 폭심지에서 2km 떨어진 지점에서 복무 중 피폭. 전후 한국에서 교편을 잡으며 한국의 피폭자 원호 활동에 힘써,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라 역설하였다.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피폭 범위 비교. 나가사키는 산이 열풍을 막아주어 피해가 비교적 적은 범위에 국한되었지만, 히로시마는 그렇지 못했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조선인은 10만명에 달한다고 알려져있다. 추도시설에는 그들의 이름도 새겨져있다.아픔의 역사인 원폭돔이 보이도록 설계된 추도시설.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유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을 위해, 구조물에는 언제나 물이 흐르고 있다.향을 꽂는 기물에 적혀있는 가타카나 '히로시마 ヒロシマ'는 피폭 도시로서의 히로시마를 강조할 때 쓰이는 표기이다.평화의 종일본의 초중고에서 접어 보내온 평화의 종이학평화의 관음상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세계유산 원폭 돔, 보강 수리 공사 중이었다.가까이서 보니 을씨년스럽다원폭 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애니메이트가 있었다. 지방도시 치고는 꽤 큰 규모였다.다시 시내로.전날 호텔 팜플렛에서 호쿠사이 만화 특별전을 홍보하고 있길래 보러 미술관에 왔다. 정말 무계획 여행..내부는 촬영 금지였지만 엄청 재밌는 특별전이었다. 이런 만화적 표현들이 에도시대에 등장했다니.히로시마성 해자코로나 때문에 임시 휴관중이었다.성앞 공원 노점들히로시마 호국신사해가 벌써 지길래 동네 이자카야에 들어가 적당히 마시다가 자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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