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토P - 소녀 레이

 

미키토P의 소녀 레이(少女レイ)는 두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보컬로이드 악곡이다.

작곡가 미키토는, 소녀 레이의 줄거리와 배경설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2023 니코니코 초회의 참가 후기 (2) - 초핫의 잡동사니들 (tistory.com)

 

노래의 화자 A는 동성 친구 B를 가슴깊이 사랑하지만, B는 A의 고백을 '너는 친구야' 라는 대답과 함께 거절한다.

A는 반 친구들을 선동해 B를 왕따시키고, 그 집단 따돌림에서 B를 구해내 사랑을 얻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A의 기대와 달리 B는 기차 건널목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유령이 된 B의 환각에 시달리다 A도 건널목으로 향한다.

 

5분 남짓의 노래에 담긴 서사가 너무도 슬프고.. 오타쿠 용어로 맛있어서 항상 즐겨 들었다.

 

 

작년 가을쯤, 일본 트위터에 소녀 레이의 배경을 찾아냈다는 트윗이 올라왔다.

그때부터 나는 소녀 레이의 배경이 된 장소에서 이 노래를 들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능하면 작중 시점처럼 무더운 여름에.

 

 

성지의 위치는 시마네현 하마다시 오리이역 동쪽 건널목

 

문제는 해당 장소가 일본 최고의 오지로 꼽히는 시마네현, 거기서도 현청소재지랑 한참 떨어진 깡촌에 있다는 점이었다.

오사카에 거주 중이지만 훌쩍 갔다오기엔 너무 멀어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는데

 

少女レイ - いよわRemix - ニコニコ動画 (nicovideo.jp)

 

Ghost Girl (少女レイ) - iyowa Remix

Ghost Girl (少女レイ) - iyowa Remix [音楽・サウンド] I have a weak(yowa) stomach(i), so I'm iyowa.Orig sm33546451---Credits to the original artis...

www.nicovideo.jp

 

여름 보카코레에 올라온 이요와 리믹스를 듣고는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마침 한여름이기도 하겠다. 정말 오직 저 해변에서 노래를 듣겠다는 일념 하나로 온갖 일들을 처리하고, 4시간 후에 출발하는 심야 버스표를 예약한 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출발했다.

 

 

22시경, 집근처 역에서 열차를 집어타 도착한 오사카역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내가 타고가야할 23시 히로시마행 버스가 스크린에 떠있다.

 

 

일본 지리를 조금 안다면 아니 왜 시마네를 가는데 마츠에 직행 버스를 안타고 히로시마로 가나?? 싶겠지만

성지가 있는 시마네현 하마다시는 시마네 현청소재지인 마츠에보다 히로시마에서 훨씬 가깝다 + 오봉 연휴때매 시마네 가는 표가 없었다.

 

 

삼복더위 속에서 기다리다보니 도착한 버스

한국인 여행객이 심야버스를 탈 일은 보통 없겠지만, 목적지에서 새벽부터 움직여야할 경우에는 꽤 괜찮은 선택지가 되어준다.

 

 

이제는 익숙해진 4열시트 야행버스

 

 

새벽 5시, 그렇게 도착한 히로시마 역전 풍경

 

 

 

하마다로 가는 버스는 8시에나 있으니 그때까지 새벽 히로시마 산책이나 하면 된다.

 

3년만에 찾은 히로시마역

열차가 운행하기 전이라 완전히 개찰구를 막은 모습이 새로웠다. 이렇게 막아둔건 처음 보았다.

 

히로시마성으로 걸어가는 길

역에서 약 20분가량이 소요된다.

 

히로시마 호국신사

 

히로시마성

 

 

원폭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공명당 대표의 꽃다발이 가장 중앙에 있는게 좀 재미있었다

 

평화기념공원, 아침부터 희생자들을 추도하러 온 시민들

 

원폭돔을 바라보도록 설계된 추도시설. 석관에 적힌 글귀가 인상적이다.

 

평안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을테니

安らかに眠って下さい 過ちは繰返しませぬから

 

 

방문일이 8월 8일이었는데,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이 8월 6일이다보니 여느때랑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영화 '오펜하이머' 일본 개봉이 미뤄지자 놀란빠인 일본 친구 한 명은 방콕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왔다.

멀티플렉스에서 A3사이즈 포스터를 공짜로 줘서 기념품으로 가져올까 하다가, 입국장에서 '아니 왜 원폭 포스터를 들고와요?' 소리를 들을까봐 버리고 왔다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도 피폭 1세대가 살아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만..

 

히로시마는 시내에 큰 강이 흐르고 있어 물의 도시라는 인상이 강하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찻집에서 시간을 때우고 난 뒤 도착한 히로시마 버스터미널

 

8시 15분에 출발하는 하마다행 버스에 탑승한다.

 

히로시마에서 하마다까지의 편도 요금은 3,090엔

나중에 일본 위키를 찾아보니, 하마다는 이즈모나 마츠에에서 너무 멀어 주민들이 쇼핑을 하러 히로시마로 온다고 한다. 그래서 버스 편수도 생각보다 많았다.

 

산인과 산요를 잇는 버스를 타고 하마다로.

 

하마다에 도착해, 정말 작은 마이크로 농어촌버스로 갈아타 오리이역으로 향했다.

버스가 너무 늦게 도착해 뛰느라 사진을 찍지 못했다..

 

차창 밖으로 오리이역이 보인다

 

역앞 정류장에 내려 찍은 사진

작은 민가만 몇 채 있을뿐, 정말 바다와 산과 하늘만 있는 곳이었다.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하늘이었지만, 드디어 도착한 소녀들의 마지막 장소

탁 트인 해변으로 향하는 길과 건널목이 정취를 돋운다.

 

소녀 레이 일러스트

일러스트에도 등장한 멈춤 표식
소녀의 시점

바다를 등지고 찍은 사진

코앞까지 능선이 밀고 들어와있다.

 

갑자기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해 일단 역쪽으로 걸어가보았다.

아주 작은 어촌인 오리이 마을 정경

 

타이마 간이우편국 (大麻簡易郵便局)

이 지역은 타이마(大麻)라고도 부르는데,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대마다. 대마초 할때 그 대마.

마을 뒷산에 9세기에 창건된 유서깊은 타이마산 신사(大麻山神社)가 있던데, 현대에 와서 엄한 이름이 되었다.

 

아담한 산인본선 오리이역(折居駅) 역사

 

역사 내부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관광지라고 할만한 지명도는 없는데, 지역 주민들이 잘 관리하는 것 같다.

 

오리이역 최고-!!

여행객들의 흔적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역 노트(駅ノート)에는 소녀 레이 순례객들의 손때도 묻어있었다.

 

오리이역 시각표, 오후에는 2시간씩 열차가 오지 않는 시간대도 있다.

해변까지 5초 역세권
이용객이 대체 얼마나 있을지 의심이 가는 주변 모습, 멀리 보이는 도로변 식당은 폐업한지 오래였다.

백사장도 있는데 사람이 올지는 모르겠다.

주변에 샤워장이나 변변한 민박도 하나 없던데, 진짜 주민들 말고는 안 쓸지도.

 

비도 피할 겸, 전날 저녁부터 거르고 있던 끼니를 먹기 위해 국도변에 있는 휴게소로 걸어가는 길

우산이 있긴 했는데 여기서 우산 펼치고 가다간 화물트럭에 치여 소녀들처럼 될까봐 수건으로 머리만 덮고 갔다.

 

15분 정도를 걸어가니 보인 휴게소, 유우히 파크 미스미(ゆうひパーク三隅) 표식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서 도착한 휴게소

화장실에서 마른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입장

 

휴게소 공홈에서 퍼온 사진

원래 이 휴게소는 쉬면서 창밖의 바다와 열차를 구경할수 있는 사진 스팟으로 유명한데

 

날씨가 이 모양이라 그냥 포기하고 밥이나 먼저 먹기로 했다..

예보는 흐림 뒤 맑음이었는데 ㅠㅠ

 

해산물 요리가 주 메뉴인 휴게소 식당

창밖으로 펼쳐지는 바다
카이센동, 1600엔

그래도 카이센동은 정말 맛있었다.

역시 바닷가에 왔으면 해산물을 먹어줘야 한다.

 

친절하게 열차 통과 예정 시각표도 붙여둔 휴게소 외벽

 

비내리는 휴게소

원래는 이곳에서 느긋하게 열차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비가 내려 좋은 사진을 건지긴 틀린 것 같아

소녀 레이 작중 상황처럼 '건널목에 차단봉이 내려가있는 사진'이라도 건지려고 비내리는 국도변을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가 보기 불쌍했는지 "야, 타."를 시전하셨다.

 

명함 뒷면에 있던 동네 할아재 그림, 올해로 72세신데 엄청 정정하셨다.

 

통성명하고 이야기 나누다가 명함까지 받았는데 지역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이셨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취미삼아 아마추어 코미디언도 하신다고.

 

 

 

대화는 대략 이렇게 이어졌다.

 

어디서 왔냐? → 한국인인데 오사카에서 왔습니다

 

한국인이 이런 촌구석을 대체 왜 왔냐?

인터넷에서 젊은이들한테 유명한 '소녀 레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 배경으로 오리이역 건널목이 쓰여서 보러왔어요

 

그거 하나 보자고 여기까지 왔다고?? → 넵

 

일본인들이 욘사마 겨울연가 배경 보려고 한국 가던거랑 비슷한건가? 

맞아요 ㅋㅋㅋㅋㅋ

 

 

그 '소녀 레이'라는 노래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냐? 

유튜브 조회수가 2900만이에요 ㅋㅋ 물론이죠

 

대체 왜 이런 촌구석에 외국인 청년이 왔는지 엄청 궁금해하시던데, 직접 핸드폰으로 확인하시고 와 이거 진짜 우리동네 건널목이네 ㅋㅋㅋ 하시는게 너무 보기좋았다. 곧장 차 몰고 건널목으로 가서 함께 즉석 성지순례도 마쳤다.

 

 

그렇게 소녀 레이를 내비게이션 블루투스로 연결해 들으면서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즐겼다.

 

차내 사진들은 허락 받고 찍었고, 인터넷에도 올려도 된다고 흔쾌히 말씀해주셨다.

노래 좋다고, 동네 친구분들한테도 알려주고 자랑해야겠다고 하시는데 진짜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말씀이었다..

 

건널목 바로 옆에 있는 무인 상점, 드라이브인 니혼카이(ドライブイン日本海)

한 30분가량 드라이브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로변 무인 상점에서 음료수 뽑아주시곤 쿨하게 역에다 내려주곤 갈 길을 가셨다.

 

이런게 즉흥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쇼와의 냄새가 그대로 남아있는 점포 내부
주변에 이렇다할 편의시설이 없다보니, 음료수나 컵라면 등을 파는 자판기를 들여놓고 운전기사들을 상대로 영업하고 있다.
재떨이와 구식 게임기와 식탁, 자판기가 함께 있는 슈르한 풍경. 일본인들의 방문기를 보니 이곳도 꽤 유명한듯.
상점 앞에 있던 고양님들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이에 날씨가 훨씬 나아졌다.

 

건널목 앞에서 파도소리와 미키토의 음악을 들으며 기다리길 한참

드디어 열차 신호음이 울리고 차단봉이 내려간다.

 

플래쉬백, 매미 울음소리,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너
푸른 하늘만 남기고 끝나는 노래
살결이 하얗던 소녀가 보았을 풍경

매미 소리가 들리는 한여름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건널목에서 역으로 향하는 바닷가

 

 

그 뒤로는 역앞의 방파제에 걸터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돌아갈 열차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소녀 레이를 들으면서 맞는 바닷바람이 정말 기분 좋았다, 또 한여름에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오리이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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