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 일본은 금요일이 공휴일이라 금토일이 쉬는날이었다.

비자 때문에 골머리 앓으면서 학교 오가던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친한 일본인 학과 선배가 휴일에 집이나 놀러오라고 해서 바로 갔다왔다

 

선배 집은 나라에 있는데, 아스카 관련 연구를 하고있고 집에서도 지척이라 겸사겸사 답사를 다녀오기로 했다

딱히 동방을 의식하지 않고 유적지만 돌아댕겨도 동방 성지가 지천에 깔려있는 행복한 공간

 

 

일본의 역사에는 아스카 시대(飛鳥時代)라는 시대 구분이 있다

 

아스카 시대는 6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걸쳐져있으며, 아스카 지방이 수도로 기능하며 궁전이나 사찰이 세워진 시대다.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문물이 대륙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이며, 쇼토쿠 태자의 섭정 아래 다양한 개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번 성지순례기에선 아스카 시대를 역사순으로 살펴보며 그게 동방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찬찬히 쓰겠다.

원래는 무조건 내가 방문한 순서대로 기술했는데, 아스카는 아는만큼 더 재밌는 성지인지라 이게 더 효율적일 것 같아서..

 

 

 

타치바나데라 (橘寺)

나라현 아스카촌

 

 

첫번째로 살펴볼 성지는 타치바나데라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귤사라고 읽히는 절이다

 

 

경내에 걸려있던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

태자가 제정한 17조 헌법의 1항이자, 신령묘 6면 스테이지 명으로 쓰인 「和를 제일로 여기라」가 쓰여있다

 

 

타치바나사는 쇼토쿠 태자의 출생지로 유명한 사찰이다.

쇼토쿠 태자는 원래 우마야도노미코(厩戸皇子)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여기서 우마야도는 마굿간을 뜻하고 미코는 황족의 아들을 뜻한다.

 

전승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는 킨메이 텐노의 별궁이었던 타치바나노미야의 마굿간에서 태어났다고.

그 뒤에 태자가 성장해서 별궁을 절로 바꿔버린 것이다. (橘宮 -> 橘寺 / 미야 -> 테라 / 궁전 -> 사찰)

 

태자의 아명인 '미코'가 신령묘 토요사토미미노 미코의 '미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겠지

 

 

 

타치바나사의 본당, 태자당

본존불로 중요문화재 쇼토쿠 태자좌상을 모시고있으며,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쇼토쿠 태자가 어떻게 권력을 잡고 개혁을 이끌 수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선, 아스카 전반기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서기 538년, 백제의 성왕이 불상과 불경을 야마토 조정에 전해줘 일본에도 드디어 불교가 전래되었다.

587년, 야마토의 왕(천황)이 불교에 귀의하자, 대신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대립이 심화된다

모노노베는 불교를 배척하는 배불파, 소가는 불교를 수용하자는 숭불파의 선봉에 서서 서로를 공격했고,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 (정미의 난 丁未の乱)

 

이 전쟁에서 쇼토쿠 태자는 소가씨의 편에 서서 싸웠고, 결국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전사하며 모노노베씨는 멸망한다

정미의 난에서 승리한 소가씨는 권력을 잡아 휘둘렀고, 일본 최초의 여성 군주인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을 옹립한 뒤 쇼토쿠 태자가 섭정하게 한다

 

 

숭불파였던 소가씨와 쇼토쿠 태자는 일본 곳곳에 사찰을 세웠고 그 절들은 지금까지도 남아 사람들의 신앙처가 되고 있음.

상술했지만 타치바나사 또한 쇼토쿠 태자가 직접 세운 7대사 중 하나

 

특히 일본 불교의 태자 신앙은 아주 두터워서, 어느 절을 가나 '태자당'이라는 부속 당우를 볼 수 있을 정도임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불교를 정착시킨데 아주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동방에서는 당연히 쇼토쿠 태자에서 따온 토요사토미미노 미코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고

특히 신령묘 최종스펠 「갓 태어난 신령」은 태자의 출생지로 비정되는 타치바나사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봐도 좋을듯

 

 

또한 경내 태자당 바로 앞에는 태자가 타고다닌 말인 쿠로코마 동상이 서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귀형수 쿠로코마 사키의 성지

 

 

쿠로코마는 태자가 타고 다니던 애마로

태자가 처음 쿠로코마에 올라탔을 때 갑자기 하늘을 날아 후지산을 넘어 시나노 지방의 신들을 만나고 3일만에 아스카로 돌아왔다고 한다.

 

 

동상 근처에는 쿠로코마에게 바치는 와카 비석도 하나 서있었다

「くろこまの あさのあかきに ふませたる をかのくさねと なづさひぞこし」

 

의역하자면, 태자가 쿠로코마에 타서 달리다보니, 예전에 쿠로코마가 밟았을 아스카의 풀언덕이 그리워서,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는 뜻

 

 

 

 

그 외에 동방과 관련한 기록을 찾아보면

 

태자가 천하태평을 이룩하기 위해 하타노 카와카츠(秦河勝)에게 직접 만든 66개의 가면을 하사해

타치바나사에서 오키나마이(翁舞, 할아버지의 춤)을 추게 했다는 기록이 있음.

이것이 일본 전통 예능 가면극인 사루가쿠・노가쿠(猿楽・能楽)의 시작인데

 

하타노 카와카츠의 가면은 하타노 코코로의 모티브이자, 마타라 오키나의 원소재가 되는 인물이기도 함

 

 

하타노 카와카츠 관련 성지순례글

https://chohot-touhou.tistory.com/330

https://chohot-touhou.tistory.com/365

 

마타라 오키나 고찰글

https://chohot-touhou.tistory.com/382

 

자세한 설명은 링크 참조

 

 

 

코겐지 (向原寺)

 

 

아스카시대의 전반적인 역사를 알아보았으니, 이젠 조금 파고들어가보자

두번째로 살펴볼 동방 성지는 코겐지,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향원사라 읽을 수 있는 절이다

 

여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돌아보는 유적지가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아서

선배가 나보고 여긴 대체 왜 가는건데?? 라고 물었는데 무작정 끌고옴 ㅎㅎ;

막상 선배도 오고 나서는 흥미롭고 재밌는 곳이라고 잘 돌아보더라

 

 

코겐지 앞에 서있는 토유라데라 터 설명판

 

사실 코겐지는 나중에 다시 창건된 사찰의 이름이라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정말 중요한건 이 절 자리에 있었던 토유라데라(豊浦寺)라는 절이다.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 13년(552년)의 기사를 보면

백제의 성왕이 보내준 불상을 소가씨의 수장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가 본인의 집에 봉안했다고 한다.

이나메의 집은 지명에서 따와 무쿠하라의 집(向原の家)이라 불리었는데, 이나메는 집을 깨끗이 하고 사찰이라 하였다.

 

 

하지만 불상이 일본에 건너온 뒤 나라에 역병이 돌자

배불파 모노노베 씨의 수장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는 역병은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와 일본의 토속 신들이 분노해 일어난 것이라고 천황에게 아뢰어

천황의 칙명으로 절을 불태우고 불상을 나니와의 호리에(難波の堀江)라는 연못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정미의 난을 거쳐 모노노베씨가 제거된 뒤, 이나메의 무쿠하라의 집은 재건되어 사쿠라이지(桜井寺)라는 어엿한 이름을 달고 사찰로서 기능했다고 한다.

 

후에 사쿠라이지 근처의 토유라라는 곳에서 즉위한 스이코 천황은 본인의 거처를 사쿠라이지로 옮겨

절과 궁전이 장소와 이름만 바뀌어 토유라데라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궁전은 오하리다노미야小墾田宮라 불리었다)

 

 

정리하자면

무쿠하라의 집(이나메) -> 모노노베씨의 폐불 -> 사쿠라이지 -> 토유라데라 -> .... 코겐지

로, 아주 파란만장한 역사를 고대로부터 지녀온 절이라 할 수 있다.

 

코겐지 바로 옆에 있는 이 연못이 불상이 버려진 곳, 즉 나니와 연못이라는 설이 있어, 지금도 사당이 세워져있다.

 

 

후토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코겐지와 얽힌 이야기는 모노노베노 후토의 3번스펠 염부 「폐불의 염풍」 염부 「사쿠라이지 염상」의 모티브가 되었다.

 

말그대로 모노노베가 불태워버린 소가씨의 사원을 뜻하는 스펠카드

 

 

젠코지식 약사여래삼존불의 예시

 

 

여담으로, 연못에 버려졌다는 약사여래불상은 혼다 요시미츠(本田善光)라는 스님이 건져다가 나가노로 가져온다.

해당 불상은 젠코지(善光寺)에서 현재도 본존불로 모셔지고 있는데, 654년 불상이 스스로 비불(秘佛)을 선언한 이후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는다.

 

성왕의 모습을 본땄다는 젠코지의 약사여래불은 일본 최고의 불상으로 여겨져

가마쿠라 시대 이후 일본 각지에서 젠코지식 약사여래불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비봉클럽 이자나기 물질에 '소에게 이끌려 젠코지 참배'라는 악곡이 있으니 아주 관계가 없진 않지만 견강부회인듯 ㅎㅎ;

 

 

 

고궁 유적 (古宮遺跡)

 

 

정식 명칭은 전 스이코 천황 오하리다노미야 터 (伝推古天皇小墾田宮跡)

 

상술했던 오하리다노미야라는 궁전의 터이다.

스이코 천황의 치세는 여기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쇼토쿠 태자의 섭정 또한 여기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아스카는 평지밖에 없어 렌탈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기 딱 좋다. 선배랑 자전거타고 신나게 돌아댕김

보다시피 경작지라 직접 들어가 유구를 확인하긴 어렵고, 저 멀리 고분 하나만 겨우 보인다.

 

농사 지으시던 아저씨가 뭐 이런데까지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나 하고 이상하게 쳐다보시더라

 

 

그래도 고대의 왕궁 터이니 사학도에겐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소

쇼토쿠 태자는 이곳에서 섭정을 했을테니, 관위 12계나 17조 헌법도 여기서 제정되었을 것이다.

 

 

구글에서 주워온 관위 12계와 17조 헌법 짤방

 

관위 12계의 제정으로 호족 정치에서 조금은 탈피해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17조 헌법으로는 관료나 호족에게 도덕적 규범을 제시해 사회의 안정을 꾀했다.

 

이는 쇼토쿠 태자의 가장 큰 업적으로, 일본 고대 정치체계를 확립한 인물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코의 스펠 명예「십이계의 관위」 안광「십칠조의 레이저」는 여기에서 따온 것으로,

정말 지극히 태자가 쓸법한 스펠이다.

 

 

 

아스카데라 (飛鳥寺)

 

 

쇼토쿠 태자의 비호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던 소가씨는 이곳저곳에 절을 창건한다.

 

아스카데라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창건한 절로

소가씨의 씨사(氏寺, 유력 호족이나 왕족의 제사를 위해 세워진 절)로 다년간 기능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정미의 난이 끝난 뒤 우마코는 모노노베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며 아스카데라를 세우고자 했다.

이때 백제에서 목수나 와박사, 화공과 스님 등이 파견되어 창건을 도왔다고 하며, 590년대 말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식 사찰로서는 일본 최초의 사원으로 인정받으며, 백제의 와박사들이 만든 기와가 아직도 남아있어 한일교류사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도 아스카 지방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적지 중 하나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모은다.

 

 

내부에 있는 아스카 대불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대접받는데

이게 가마쿠라 시대에 한번 불타서 거의 다 소실되고 다시 만든 불상인지라, 국보 지정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100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부분만 극히 일부분만 500년대 불상이고 나머지는 1100년대 불상인거임.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생각하면 될듯.

 

선배가 교수님이랑 연구하고 있는게 이 불상의 성분 분석을 통한 부위별 조성 연대 추정이라 이야기를 전해들었는데 현장에서 들으니 아주 흥미롭더라

 

 

대불 옆에는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진 쇼토쿠 태자상도 있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자유롭게 불상을 촬영해도 되는 사찰은 얼마 없어서 너무 좋았음. 내부 촬영 가능임 ㅇㅇ

 

 

이렇듯 평화로워 보이는 고찰이고 소가씨도 태평성대를 누렸을 것처럼 보이지만, 정변이 일어나 소가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쇼토쿠 태자가 타계하고 난 뒤인 고쿄쿠 천황 재위기 643년,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소가씨의 권신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국정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루카는 자신의 사촌이자 황족인 후루히토노오에를 천황으로 만들기 위해 태자의 아들 일가를 습격해 죽음으로 내몬다.

 

그렇게 쇼토쿠 태자의 직계 자손은 모두 제거되었으나, 워낙 태자의 명망이 높았으므로 소가에 적개심을 가진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에 친 모노노베파였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라는 자가 정변을 일으켜 이루카를 살해하는데, 이를 을사의 변(乙巳の変)이라 한다.

 

 

 

을사의 변이 성공하여 소가씨는 몰락하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씨족은 급격히 성장하는데, 그가 후에 받은 성이 바로 후지와라(藤原)이다.

헤이안 시대를 주름잡을 후지와라 씨의 등장이자, 동방으로 보자면 후지와라노 모코우와도 연관 깊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카마타리의 차남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가 카구야히메에게 봉래의 옥가지를 요구받은 인물로,

동방에선 그의 딸이 모코우라 묘사되기 때문이다.

 

 

아스카데라에서 서쪽으로 80m 나아간 농경지에는 소가노 이루카의 목 무덤이라는 공양탑이 있다.

 

 

이 공양탑은 이루카의 무덤으로, 암살당한 이루카의 목이 저절로 여기까지 날아와 스스로 묻혔다고 한다.

 

이루카를 암살한 카마타리의 집에 어느날 벼락이 떨어졌는데,

이후 카마타리가 시름시름 앓다 죽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이루카의 저주'라 했다고 한다.

 

 

죽은 이루카가 산 카마타리를 저주해 죽였다는 설화는 소가노 토지코의 오버드라이브 스펠 원령「이루카의 벼락」로 재현되었다.

정말 서로 죽고 죽이는 설화만 스펠로 쓰인 모노노베와 소가...

 

 

 

아스카궁 터 (飛鳥宮跡)

 

 

마지막으로 살펴볼 성지, 아스카궁 터이다.

643년부터 645년까지 짧은 기간 천황의 거처로 기능한 곳으로, 보통 아스카이타부키노미야(飛鳥板蓋宮)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상술한 을사의 변은 이 아스카궁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물론 바로 천도를 하진 않았으니, 소가씨에서 후지와라로 권력 이양도 여기서 일어났다.

 

 

을사의 변이 성공한 뒤, 이루카가 살해당하는걸 눈앞에서 목격한 고쿄쿠 천황은 스스로 퇴위하고

카마타리와 손을 잡았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후의 덴지 천황)는 고쿄쿠의 동생이자 본인의 삼촌이었던 코토쿠를 천황으로 추대한다.

 

 

그렇게 정권을 장악한 나카노오에는 곧바로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을 발표한다.

다이카 개신은 당나라의 율령제를 도입한 정치 개혁으로, 아스카의 호족을 위주로 이루어진 정치가 천황을 중심으로한 중앙 집권 체재로 바뀌는 시점이 되었다.

 

 

 

다이카 개신은 일본어로 발음이 같은 「큰 불의 개신 」(大火の改新)로 패러디되어 심기루 후토 스펠카드로 나왔다.

결국 소가랑 모노노베 둘 다 멸망했지만 카마타리가 친모노노베파였으니 끝에 웃은건 후토일 수도...?

 

 

 

여행하며 성지순례 돌고 역사 공부까지 겸사겸사 가능한 아스카로 떠나봐요~~

 

 

 

가는 방법

긴테츠 요시노선 카시하라 진구마에역, 오카데라역, 아스카역 등 하차

렌터카나 렌터 사이클, 도보 등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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